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 편집부
  • 승인 2013.10.23 22:08
  • 호수 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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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규 인(보은향토문화연구회/보은장신)

가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난여름의 유례없는 더위를 겪어낸 산천초목들과 사람들에 대한 자연의 배려인지 이번 가을은 참으로 날씨가 좋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날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라는 미당 서정주의 시 한 구절을 굳이 빌려오지 않아도 저절로 가슴이 환해지는 그런 푸른 하늘을 여러 날 향유하고 있습니다.

설악산의 붉은 단풍이 이제 속리산으로 옮겨오고, 우리 지역 특산품인 대추는 볼이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때맞춰 열린 대추축제는 말 그대로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급격히 감소하는 인구로 인해 고적감조차 느껴지던 지역에 비록 한정된 기간이지만, 사람의 향기와 유쾌한 북적임이 넘쳐흐릅니다. 축제장에서 만난 친구의 얼굴이 조금은 수척한듯하여 걱정을 하였더니 “ 아이고! 대추 때문에 그려" 하면서도 입가에는 벙긋벙긋 미소가 번집니다. 그 친구는 퇴직 후 대추농사를 짓고 있는데 아마도 요즘 온라인으로 금액이 찍히는 예금통장을 자주 들여다보는 모양입니다.

가을은 이렇게 우리 모두를 넉넉하게 해 줍니다. 이른 봄부터 지금까지 흘린 땀방울과 정성을 꼭 돈으로 환산하지 않아도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행위는 그 자체가 기쁨이며 동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특히 그 감사하는 마음은 생명을 가꾸어 결실을 얻는 것은 나의 정성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초월한 어떤 영원한 존재의 보살핌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겸손한 깨달음을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가을은 오곡백과뿐만 아니라 사람도 여물도록 하는 지극히 듬직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풍요롭고 평화스런 자연의 분위기와는 달리 국내정치와 국제정세의 분위기는 어지럽고 험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안으로는 국가의 중추기관인 검찰과 보건복지부 수장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인한 인사의 난맥이 국민들에게 회자되고, 밖으로는 일본의 우경화로 촉발된 대결과 적대의 격랑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연일 부자들의 탈세와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가 뉴스의 앞부분을 차지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만고의 격언도 최소한의 도덕적 품성을 갖추지 못한 부자와 공직자의 탐욕 앞에서는 그 의미가 퇴색하는 세태가 된 것 같습니다.

산외면 원평리로 귀농해 한우를 키우고 사과밭을 일구는 후배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자신의 과수원에서 학생들의 체험학습이 예정되어 있으니,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교직에 종사했던 나의 이력을 존중해서 하는 부탁이다 싶어 흔쾌히 허락하고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사과’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들 예를 들어 선악과로 알려진 아담과 이브의 사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뉴톤의 사과, 정의롭지 않은 권력을 단죄한 윌리엄 텔의 사과, 질투의 무서움과 사랑의 용기를 알게 하는 백설공주의 사과, 세상의 종말과 그것에 대한 가장 현명한 대처로서의 스피노자의 사과 등등.

약속된 날짜와 시간에 맞춰 사과밭에 갔더니 체험학습을 나온 학생들은 네 살짜리 유치원생들이었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상황에 우물쭈물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후배는 파안대소를 합니다. 그때서야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외부 활동을 피하는 나를 과수원으로 불러내고 싶어 꾸민 따뜻한 계략(?)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내일 이 세상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엄숙한 사과는 튼튼해지고 예뻐지고 또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도록 만들어 주는 네 살 어린이용 사탕발림 사과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빨간 사과를 든 아이들의 작고 귀여운 손, 갑작스럽게 조작(?)된 설명을 거듭 거듭 확인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들, 푸른 하늘, 따뜻한 햇살,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안치환의 노래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가을 한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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