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향만리(品香萬里)
품향만리(品香萬里)
  • 편집부
  • 승인 2013.10.04 09:33
  • 호수 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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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규 인(보은향토문화연구회/보은장신)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과수원 옆을 지나면 향긋한 사과 향기가, 논둑길을 걷다 보면 구수한 벼 냄새가 저절로 몸에 스며듭니다. 인기척에 놀란 메뚜기들이 어지럽게 튀는 가운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옆을 따라 옵니다. 가을맞이를 나온 나와 동행이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

지난 일요일엔 가을비답지 않게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바람을 동반하지 않고 비만 곱게 내려서 농심(農心)에 멍이 드는 힘든 상황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 고마운 것은 산과 들의 모든 열매와 곡식들이 몸에 젖은 물기를 가을 햇살에 말리면서 더 많은 향기와 양분으로 제 몸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인간사 모든 것이, 특히 농사는 자연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계절 탓인지 새벽잠이 많이 엷어졌습니다. 멀리서 닭울음소리가 들려오니 다시 눈을 붙이기는 어려운 상황, 불을 켜고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가볍고도 탁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큼직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갑자기 밝아진 상황에 당황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내는 소리입니다. 잠시 후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슬금슬금 어두운 책장 밑으로 제 몸을 숨깁니다. 창문에 모두 방충망을 달았는데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문득 때때로 우리를 찾아오는 나쁜 생각도 저 바퀴벌레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에는 건전한 상식과 이성이라는 방충망으로 자신의 삶을 촘촘하게 방비하지만 조금만 방일하면 사리사욕의 바퀴벌레는 어느 사이에 집 안으로 들어와 방 안을 활보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룏실천이성 비판’이라는 저서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 숙고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 칸트가 말한 도덕 법칙을 평범한 생활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양심’이라는 단어로 바꿔도 의미 상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보다 더 군민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던 삼승면 LNG발전소 유치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거의 1년 만에 종결되었습니다.  지난 13일 청주지법은 LNG발전소 유치 반대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기소된 강인향 위원장과 이재학, 박대희, 김정록씨에게 최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였고 위의 네 사람 모두 재판 결과를 수용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제까지 오직 땅을 상대로 정직하게 살아 온 네 사람은 그 땅과 이웃들을 지키기 위해 결국 범법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네 사람은 벌금형 대신 실형을 선고 해달라는 상식(?)을 벗어난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발전소 유치 반대 운동에 동참한 주민들께서 모아 주신 귀한 성금을 벌금으로 낭비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답니다.  지역신문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필자는 가슴이 뭉클하며 잠시 동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격한 감정이 가라앉고 나니 이내 마음이 향긋해졌습니다. 내 고향이 보은이고 이곳에서 이런 분들과 지금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화향천리(花香千里) 품향만리(品香萬里)라는 말이 있습니다. 꽃향기는 천리를 가고 인품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뜻입니다. 평범한 우리들이 과거의 義人(의인)을 공경하고 또한 이 시대에 많은 의인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이유도 바로 그 높은 향기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벌금형 대신 실형을 선고 해달라고 요청한 이분들의 의로운 행위는 보은군의 귀중한 정신적 자산이 될 것입니다.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가볍지 않다’라는 이웃 나라 어느 시인의 짧은 시 한 수가 결코 가볍지 않게 다가오는 까닭도 아마 그 향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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