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백과 풍성한 늘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속담이 있다. 올해는 이른 추석이어서 오곡백과가 풍성하지 않다 벼는 익지 않았고 사과와 배도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 밤도 송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른 추석이어서 넉넉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추석은 사람의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아마도 자주 보지 못했던 가족들, 친척들, 그리고 자식들도, 손자손녀도, 증손자, 증손녀들 안아볼 생각에 고향의 늙은 부모들은 달력의 빨간 날을 하루, 또 하루를 지우며 이제나, 저제나 올 자손을 기다린다.
생각만 해도 푸근해지는 고향엔 애처롭고 가슴이 아려오는 늙은 부모가 있고 그 부모는 부모와 함께 나이를 먹은 늙은 집을 지키고 있다.
9월 17일 추석이다. 큰아들이 차례를 지내 추석이 바쁘지 않지만 품을 떠난 자식들을 기다리는 산외면 대원리 1세기를 산 두메마을 안주훈·홍소선 부부도 자신들과 함께 늙어가는 집을 지킨다. 우리의 부모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질곡의 삶, 안주훈·홍소선 부부가 살아온 1세기 현대사 구술을 기록해 본다.
#“뭐가 있어야지 추석이라고 변변하게 음식 만들지도 못했어”
영동군 상촌면에서 두 살 때 할아버지를 따라 내북면 동산리로 이사한 19살의 안주훈 어르신은 자신보다 두 살 아래인 홍소선 어르신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부금술이 좋아 결혼 83주년인 부부는 슬하에 1남 4녀를 뒀다. 제사는 연로한 노부부를 대신해 큰아들이 모셔 갔기 때문에 홍소선 할머니는 직접 추석 준비는 하지 않지만, 추석이 다가오면서 자손들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느라 하루해가 멀기만 하다.
“지금은 음식이 천지지. 먹다 버리는 음식이 얼마나 많아. 하지만 옛날에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어. 뭐 먹을 게 있어야지. 추석 때면 제사상을 차려야 하는데 제수용품을 준비하는 것도 힘들었어. 그래서 조상님들께 늘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그래도 정성으로 상을 차리지. 그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
홍소선 할머니는 어려웠던 시절 추석 상차림 했던 때를 떠올리며 제수용품을 넉넉하게 마련하지 못해 자식들 배불리 먹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청주 도회지 출신인 홍소선 할머니와 2남1녀의 장남이었던 산골총각 안주훈 할아버지의 결혼은 홍소선 할머니 당숙의 중매로 이뤄졌다. 홍 할머니의 당숙이 동산리에 살았는데 떠꺼머리 안주훈 어르신을 눈여겨보고 조카를 중매한 것.
얼굴 한 번 안 봐도 어른들이 짝을 지어주면 거역을 안 하고 결혼했던 당시 도회지 처녀 홍소선 할머니도 산골 살이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홍 할머니는 엄마가 자주 보지도 못할 딸을 그것도 첩첩산중의 산골로 시집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매일매일 눈물로 밤을 새웠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남편 하나 보고 산골로 시집온 홍소선 할머니의 희생적인 삶으로 평생을 살아서 한 가정을 온전히 일굴 수 있었다.
시아버지가 일찍 작고해 홍 할머니의 남편인 남주훈 할아버지를 비롯해 2남1녀의 손자손녀를 키운 시조부모는 내북면 동산리에서 산외면 대원리 높은점이로 이사했다. 그러다 다시 산외면 대원리 현재 살고 있는 동네인 여동골로 옮겼다. 살 곳을 찾아 이삿짐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것도 잠시 남편 안주훈씨는 일제강점기에 첫딸을 놓고 군대를 가 제주도에서 군 생활도 했다. 해방된 후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해 다시 참전용사로 3년 넘게 군 생활을 했다. 전쟁 중 안주훈 할아버지는 날아오는 총탄을 왼손을 맞아 왼손의 손바닥 일부가 크게 훼손되는 상처를 입은 채 상이군인이 돼서 제대했다.
남편군대 간 사이 남편 대신 자식들 먹이고 키우는 일, 그리고 시조부모 모시는 일 등 집안일은 모두 홍 할머니의 몫이었다.
낮에 들일하고 밤에 잠자는 시간 쪼개서 목화솜 펴서 따뜻한 겨울 이불을 만들었다. 그리고 목화솜으로 실을 만들어 베틀에 앉아 천을 만들어 시할머니 치마저고리에 시누들 치마저고리, 시동생 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입혔다.
한복 버선코를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처음에 잘못 만든다고 혼을 냈던 시할머니도 나중엔 인정하던 솜씨가 됐다.
홍소선 할머니는 음식도 잘 만들었다. 변변한 재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조물조물해서 상에 올리면 시조부모님과 자식들이 잘 먹었다. 안주훈 할아버지도 “할머니 음식솜씨가 좋았어. 뭣이든 뚝딱해서 만들어놓는데 맛있어”라고 홍소선 할머니의 수준급 음식솜씨를 인정했다.
#전쟁터에서 총상 입은 남편 대신 하느라 힘들었어
홍소선 할머니는 나무를 해서 때는 일은 물론 갖은 산나물을 뜯어다 나물죽을 쑤어 끼니를 준비했던 일 등 버거운 집안일은 계속됐었다. 남의 집 사랑방에서 도지세 물면서 살면서도 작고한 시할머니의 3년 상을 치렀을 정도로 맏며느리, 효부였다.
어머니가 고되게 집안일을 꾸려가는 것을 본 큰딸도 어머니 돕는 일을 자처했다. 자기보다 더 무거운 나무를 머리에 이고 집에 오고 산나물을 채취하는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을 정도로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했다. 큰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홍소선 할머니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홍소선 할머니는 6, 70년 전을 기억하며 “너무 안타깝고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온전한 몸으로 돌아오길 학수고대했던 남편 안주훈 할아버지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크게 다쳐 힘들었다. 가장을 대신해왔던 아내 홍소선 할머니를 비롯해 1남 4녀 자녀들에게 안주훈 할아버지는 미안할 수밖에 없어 “모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전쟁터에서 손을 다쳐 힘든 일 하기가 어려운 남편 안주훈 할아버지는 자신을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했던 부인 홍소선 할머니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그리고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더욱 무겁게 가졌다.
안주훈 할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돈을 모았다. 그 덕분에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사서 남의 집에서 살던 가족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줬다. 도지세를 주지 않고 맘 편히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된 것이다.
남의 집 사랑방에서 시할머니 3년 상을 모셨을 정도로 종부로서 최선을 다하고 효부로서의 모습도 보여줬던 홍소선 할머니는 이제 내 집에서 제사를 모실 수 있게 됐다며 마음 후련했다.
안타까운 게 뭐가 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노부부는 “자식들을 많이 가르쳐야 하는데 겨우 밥 먹고 살 정도의 형편이라 많이 가르치지 못했어. 돌이켜봐도 그게 제일 아쉽고 자식들 고생시켜서 미안하고 가슴이 아파”라고 말했다.
자식들에게 공부 한 자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내 입에 밥 안 들어가도 배고파하지 않았던 우리의 부모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안주훈·홍소선 부부는 자식들에게 공부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뒤를 밀어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자식들이 돌보니까 우리가 이만치나 지내지”
1남 4녀를 둔 노부부의 첫째(큰딸)는 벌써 81세이고 둘째인 외아들은 74세다. 셋째(딸)는 71세, 넷째(딸)는 68세, 막내(딸)는 61세다.
청주에 사는 셋째 딸이 안주훈·홍소선 부부를 도맡아 보살피는데 소뼈 사다가 푹 고아 곰국을 만들어 소분(少分)해서 냉동고에 얼려놓아 매일매일 드실 수 있도록 해놓는다. 또 간식으로 드실 것을 해 와서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이 챙겨주는 밥상의 힘으로의 건강을 지키도록 한다. 늘 자식걱정을 달고 사는 노부부도 자식이 챙겨주니 더욱 힘이 난다고 한다.
나이가 많은 부모의 치료약은 자식이고 손자다. 피붙이인 것이다.
청주에 사는 친 손주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끔찍하게 생각한다. 안주훈 할아버지는 “옛날 집을 현대식으로 고쳐준 것도 친손자라고 했다. 최근에도 집 내부를 깔끔하게 정비해 거동이 불편한데다 더욱 노쇠해진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리모델링했다”라고 말했다.
안 할아버지는 “얼마 전에도 친 손주가 와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안부를 묻고 있다가 갔다면서 손자가 있어서 더욱 든든하다”고 덧붙였다.
거동이 불편한 노부부는 3년 전부터 마을과 이웃하고 있는 경북 용화에서 오는 이옥순(68) 요양보호사의 돌봄을 받는다. 이옥순 요양보호사는 노부부의 셋째 딸과도 같은 나이여서 친구처럼 흉허물 없이 지내며 두 백세 부부를 내 부모처럼 모시자 “우리 죽을 때까지 우리 집에 와줘”라고 할 정도로 요양보호사를 특히 의지한다.
더 연로해져 걷기 불편한 최근까지 이옥순 요양보호사는 안주훈 할아버지가 보행보조기를 짚게 한 후 동네를 돌며 걷기운동을 하게 했고 경로당에도 들러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게 하기도 했다.
아침 7시면 대원리에 와서 두 부부의 아침밥을 챙기고 청소며, 옷 갈아입히고 빨래를 빨아서 챙겨놓고 다시 점심밥을 챙긴다. 셋째 딸이 만들어온 곰국에 밥 말아서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명란젓갈을 반찬으로 놓고, 치아가 없어 씹지 못하는 할머니는 곰국에 역시 밥을 말고 쫑쫑 잘게 썬 김치를 얹어서 점심밥을 드신다. 요양보호사가 일을 마치고 가기 전 밥, 호박죽, 찐 고구마, 두유, 요구르트, 그리고 과자를 챙겨놓고 간다.
“내일 또 올게요” 하고 인사하고 대문을 나서는 요양보호사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노부부는 밖에 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사람이 그리운 시골마을 노인의 모습이다. 추석이 다가오는 이즈음 노부부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하고 부르며 품으로 들어올 자식 손주들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우리의 늙고 병든 부모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번 한가위에는 옛집에 돌아와서 서로를 꼭 안아주는 그런 포근한 한가위가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