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수리티전투 승전이끈 의병들이 살아있는 후율사가 있는 곳 수한
임진왜란 수리티전투 승전이끈 의병들이 살아있는 후율사가 있는 곳 수한
  • 송진선 기자
  • 승인 2024.09.04 22:45
  • 호수 7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 동네 구석구석 역사문화자원 기록
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주민 자조모임…수한면 탐방
우리동네 탐방원정대가 수한면의 대표유적지 후율사를 탐방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영동의 자계예술촌이 추진하는 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본사인 주간 보은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우리지역의 지정, 비지정 문화재와 생활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가 운영됐다.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는 보은에 살면서도 군내 구석구석을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는 가운데 이번 사업을 통해 동네 구석구석의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애향심을 키우고 문화재의 소중함과 조상의 지혜와 슬기를 배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이번호에서는 지난 8월 11일 삼승면과 함께 탐방했던 수한면내 구석구석을 소개한다.
지역문화를 탐색하겠다고 나선 우리동네 탐방원정대원들은 최재철 대원과 박선미 대원, 최병진 대원으로부터 수한면내 역사문화유적과 함께 생활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대원들은 “수한면을 더 깊게 아는 기회가 됐다. 지식이 차곡차곡 쌓이는 기쁨을 누린 탐방대원들은 올해 가장 큰 수확은 자조모임을 통해 우리동네 구석구석을 누빈 탐방활동이라며 만족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마지막 탐방활동을 펼친 수한면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문화유적지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했던 우리고장 의병장 등의 위패를 배향된 차정리 후율사(後栗祠)와 세조와 인연이 있는 가르침 바위 교암리(敎岩里), 기미년 3·1만세 운동이 펼쳐졌던 묘서리 등선암, 한적한 시골마을에 들어선 작은 도서관 거현산방 한일문화도서관 방문했다.
우리동네 탐방원정대의 동네 구석구석 이라는 주민 자조모임 활동실적은 수한면의 역사문화유적지 탐방 기록으로 마무리한다.
수한면은 모래가 많아서 비가와도 늘 물이 귀한 지역이기 때문에 물 수(水), 가뭄 한(旱)을 써서 수한(水旱)면이다. 하지만 충북도가 관리하는 큰 개울 항건천과 거현천이 있다. 또 농어촌공사가 관리 운영하는 광역저수지가 두 개나 있다. 일명 동정저수지라고 하는 보청저수지와 올해 4월 첫 배수를 시작한 수한저수지이다. 비가와도 늘 물이 귀한 지역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물을 가두고 있는 큰 물그릇이 있는 만큼 이제는 가뭄을 겪는 지역에서 항구적으로 농업용수가 담긴 농사짓기 좋은 지역으로 변모한 것이다.
수한면에서는 역사문화유적지를 중심으로 탐방했다. 중점적으로 탐방한 곳은 수한면 차정리 후율사이다.

#수한면 대표유적지 후율사, 임진왜란 시 승리한 전투지인 수리티 아래 건립
수한면엔 큰 고개인 수리티가 있다. 도로가 개설됐으니 지금은 험준하게 느껴지지는 않으나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면 수리티와 그 일대는 골짜기가 깊고 매우 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수한면엔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 많다. 특히 수리티는 조중봉 선생의 지휘 하에 석전(石戰)으로 왜병을 전멸시킨 곳이다. 수리티는 경사가 심해 수레가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수리’는 ‘높다’는 뜻으로 수리티는 ‘높은 고개’라는 의미다.
수리티 아래 차정리에는 의병장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후율사가 있다. 이곳에선 봄과 가을 제사를 지내 의병장들을 추모하고 있다.
후율사 입구 차정마을에는 500년이 넘는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다. 보은군지명지에 의하면 중봉 조헌 선생이 항상 말을 이곳에 세워 두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옆에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의미의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하마비는 궁궐의 정문 밖, 종묘 입구에 세웠으며, 성균관을 비롯한 각 지방의 문묘 밖에 홍살문과 하마비를 세웠다. 후율사도 입구에 하마비가 있으며 정문의 역할을 하는 솟을삼문이 있다. 또 후율사 경내 후면에는 교서비가 있다. 1592년(선조 25) 8월에 선조(宣祖)가 조헌에게 내린 교서(敎書)를 후대에 새겨 건립한 것이다.
후율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조헌 선생을 모신 곳이다.
조헌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문인인 김정백·이우 등과 함께 1천6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였던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들이 강제 해산되면서 그의 수하에 남은 의병은 700여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조헌은 남은 의병을 데리고 금산전투에 투입돼 장렬하게 싸웠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700여명의 의병과 함께 모두 순절했다.
후율사는 보은상원회(報恩象院) 송흠요 등 28명과 회인향교 유생 30인이 순조 32년(1832년)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조헌 선생과 700여명의 의병들을 기리기 위해 후율사 건립을 발의하고 옥천과 회인, 청주 등지의 유림들의 협조로 그해 10월 창건됐다. 그리고 조헌 선생과 15인의 위패를 배향했다.

#후율사에 배향된 21명의 의인
하지만 고종 8년(1871년)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렸고 그로 인해 후율사 마저 헐려 버렸다. 이후 고종 31년(1894년) 선비들이 의기투합해 단(壇)을 모으고 해마다 조두례(祖豆禮)를 올렸다. 이어 1926년엔 김영희·조병기의 발의로 재원을 마련하고 1927년 중건했으며 기존 조헌을 비롯한 15인에 6명의 위패를 추가로 배향하면서 현재는 총 21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제향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仲丁日)에 향을 피우고 절한다. 제수용품은 4변(籩)4두(豆), 즉 육포, 밤, 대추, 호두의 4변과 생 소고기, 무, 부추, 미나리를 놓는 4두를 진설한다.
후율사에 모신 21 위인은 다음과 같다.
중봉 조헌. 호는 중봉(重峯) 외에 도원(陶原)·후율(後栗)도 쓴다.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후율이란 호를 쓴 것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후학임을 자처하여 지은 것이다.
화천당 박춘무. 조헌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데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봉사 곽자방.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국, 칠백의총 순의비에 기재돼 있으며 후율사에도 배향돼 있다. 우암 송시열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월곡 김절. 동생 김약·김로, 사촌 김전과 함께 중봉 조헌 의병에 참가해 의병을 모집하고, 동생 김약과 박충검, 전승업과 조헌 선생을 도와서 차령인 수한면 차정리 수리티를 방어했으며, 금산전투에서 칠백의병과 순국했다. 충장공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충신으로 정려됐다.
인봉 전승업. 옥천출신으로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칠백의사들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중봉 조헌 선생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도곡 조완기. 조헌 선생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 조헌을 따라 종군해 금산전투에서 순국했다.
분계 조완도. 조헌의 둘째 아들로 김장생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나섰고 금산전투 직전 청주회복의 첩서(捷書)를 갖고 행재소(行在所, 별궁, 또는 행궁)인 의주로 가 순절하지 않았다.
한포재 이명백.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탈환하는 등 청주대첩을 이끈 의병장이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이명백 장군의 묘소는 마로면 원정리에서 탄부면 덕동리로 이장됐으며 보덕중학교 교문 앞쪽에 충신각도 있다.
오자옹 김약. 옥천 출신으로 조헌에게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 시 조헌의 아들 조완기와 함께 조헌을 받들어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금산전투에서 조헌의 명으로 외지에 다녀오느라 죽음을 면했고 종신토록 조헌을 애모했다고 한다.
수암 노응환. 아버지 노세득은 조헌과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응환은 스승 조헌을 따라 의병에 지원해 청주에서 왜적을 대파했다. 이어 금산전투에서 조헌 및 칠백의사와 함께 전사했다. 고향에 정문이 세워지고 지중추 부사에 추증됐다.
국재 노응탁. 노혁의 5대손으로 호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를 지낸 노세득의 차남이다. 조헌의 문인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 조헌 선생이 일으킨 의병을 따라 청주전투에 참전했고, 금산전투에서 선봉이 돼 싸우다 33세의 나이로 순절했다.
체헌 노응호. 3의사 중 한 명인 노응호는 임진왜란 때 조헌이 일으킨 의병을 따라 청주전투에 참전했다가 조헌의 명으로 호서지역의 군량을 모으기 위해 잠시 진영을 떠났고 군량미를 모아 금산으로 돌아왔을 때 두형을 비롯한 칠백의사 모두 장렬히 순절한 뒤였다. 형들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에 안치했고 조정에서 노응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 이란 관직을 부여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세의 어린나이에 죽었다.
노곡 박춘검. 옥천출신이다. 조헌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했다가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송촌 김성원. 보은읍 누청리 출신이다. 중봉 조헌 선생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여했다가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현종때 의금부사에 추증됐으며, 고향 누청리 사괴정에는 정문이 있다.
누산 이려. 보은 누청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청주전투에서 적을 섬멸하고 금산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순절했다. 숙종 43년(1717년) 사헌부지평으로 추증됐으며 누청리 사괴정에 정문이 있다.
삼송당 김로. 조헌 선생의 사위이며 김절 선생의 동생이다. 형인 김절과 김약과 함께 임진왜란 때 조헌의 의병으로 종군해 순절했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됐다.
쌍행당 김성. 의병에 참여해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며 뒤에 호좌판서에 추증됐다.
두촌 임정식. 조헌이 의병에 참여했다가 1592년 8월 18일 금산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순절했다.
취원정 김전. 임진왜란에서 조헌 선생의 종제(從弟) 3인과 함께 청주 진영에서 왜군을 크게 이긴 뒤 금성 지역으로 퇴각하는 적을 추적했다. 그 사이 김전은 격문을 받들어 완영(지금의 진주)으로 출사했다가 중봉 선생과 의병들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소식을 듣고 목놓아 크게 울었다. 임란 후 옥천군 군북면 이평리에 은거해 여생을 보냈다.
모정 구항. 임진왜란 때 청주전투에서 승전한 공로로 절충장군의 위계에 올랐으나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상과 같이 21을 살펴봤는데 조헌과 칠백의병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해 후율사 등에 위패가 배향돼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는데 빠진 의병이 있다. 바로 마로면 한중리 윤여익이다. 우리동네 탐방원정대는 동네 구석구석 탐방활동으로 마로면 한중리에서 윤여익의 충신문을 탐방한 적이 있다. 윤여익도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趙憲)의 의병에 참여해 금산에서 싸우다가 칠백의사와 함께 순절했다고 보은군지 및 지명지에도 기록돼 있다. 하지만 후율사에는 그의 위패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철종 20년 충신문을 세우도록 명을 내려 한중리에 충신문을 세운 것이니 의병에 참여한 근거는 충분해 보인다. 후율사에 위패가 왜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 윤여익의 위패도 배향할 수 있도록 조처가 필요하다.

#수리티 등 수한면 차정 일대 임진왜란 유적 많아
수한면 차정, 장선리 일대는 임진왜란 시 치열한 전투지였을 것 같다. 보은군 지명지를 보면 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설이 장선, 차정리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중 장선리에는 되목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장선리에서 노성리 점벌로 가는 고개다. 고개 경사가 급해 되목재라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조헌이 왜병이 넘어오는 것을 보기 위해 왜병의 목을 보던 고개라 해서 되목재라 불렀다고 한다.
활목재라는 고개도 있다. 차정리에서 상차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궁터골에서 만든 활과 화살로 의병들이 이 고개에 진을 치고 왜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피난봉이라는 산도 있다. 임진왜란 때 조중봉 선생이 가족들을 단련시키기 위해 가구를 아침에 피난봉으로 옮기게 했다가, 저녁이면 집으로 옮기도록 했다고 한다. 훈련을 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활목재에서 왜적들을 막았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이 산에서 무사히 피난했다고 해서 피난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의 어린 왕 단종 숙부 세조와 관련 전설도 있어
수한면 교암리는 가르칠 교(敎) 바위 암(岩)을 쓰는데 세조와 관련된 전설이 얽혀 있다. 마을입구 국도변에 있는 바위인데 1939년 국도 25호선 개설할 때 확장 사업으로 바위는 폭파돼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고 흔적만 남아 있다.
가르침 바위, 교암은 세조가 깨우친 것을 어원으로 한 전설이 있다.
영월로 어린 조카를 귀양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선왕인 단종을 무참히 살해한 세조가 피부병 치료를 위해 세조 10년(1464년)에 속리산에 행차하던 중 수한면 교암리 앞을 통과할 때 연(輦)안에서 눈을 들어 길옆 냇가(항건천 같다)를 바라보는데 장엄한 바위가 푸르스름한 냇물에 수려한 자태를 비추며 마치 일행을 맞아들이는 형태로 보였다. 그 바위를 본 세조가 지난날 왕위를 빼앗기 위해 많은 충신을 참혹하게 처단한 일과 어린 조카를 살해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자책감을 이길 수가 없어 행렬을 멈추게 한 후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바위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바위가 세조의 모든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주고 부드럽게 감싸 안는 듯이 느껴지자 세조는 바위를 가리키면서 “이 바위는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바위다.”라고 말하며 속리산으로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바위이름을 ‘가르침바위(敎岩)’라 불렀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후평리도 세조가 붙인 이름이다. 교암리에서 깨달음을 얻은 세조가 후평을 지나 보은 서다리쪽에서 뒤를 돌아보니 넓은 들녘이 보여 후평(後坪)이라 했다고 한다. 지금은 보은읍 장신리에 건물이 들어서고 후평들에는 주택, 비닐하우스, 축사 등이 들어서 서다리에서 후평리가 보이지 않으나 아무것도 없었던 그 당시에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였던 것. 후평들은 지금도 수한면에서는 평야라고 할 수 있다.

#묘서리 3.1 만세운동 유적지
수한면 묘서리는 3.1 만세운동 유적지이기도 하다. 1919년 묘서리 앞산 등선암 정상에서 음력 4월 13일 밤 자정을 기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묘서리의 최용문, 안만순, 송덕빈 3명이 주축이 되고, 마을 청년들을 규합해 3.1만세운동을 펼친 것. 보은의 3.1만세운동은 수한면 묘서리 등선암과 이곳에서의 만세운동을 펼칠 때 보은읍 길상리 뒷산 정상에서도 동시에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하는데 이는 보은의 ‘10의사 만세사건’으로 재판기록에도 남아 있다. 이들 모두 1992년 국가유공자로 추서됐다.
보은의 기미년 만세운동은 내북면 산성리 노고산성과 서지리 관모봉에서는 4월 10일 밤, 묘서리와 길상리에서는 4월 13일 밤 자정을 기해 만세운동이 전개됐다고 한다.
이밖에 병원리엔 경주김씨 효부각이 있고, 윤종 효자문이 있으며 동정리엔 장암 김광의 묘비가 있고 구 동정초등학교 부지를 기증한 고 박기종의 공덕비가 있다.
교암리엔 우암 송시열 선생의 동생인 송시도의 묘소가 있다. 광해군 5년(1613) ~ 숙종 15년(1689)까지 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금적산 아래 탄금대에 세한제와 일경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상현서원장을 지내면서는 대곡 성운, 충암 김정만 배향됐던 상현서원에 동주 성제원, 중봉 조헌을 추가 배향하기도 했다.

#시골에 들어선 거현산방 한일문화도서관
금적산과 덕대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아우르고 있는 수한면 거현1리 시골구석에 산방 도서관이 생긴 것은 보은에서는 매우 이례적이다. 지난해 4월 개관한 거현산방 한일문화도서관은 보은의 새로운 생활문화 유산으로 기록할만하다.
산방은 한일비교문화와 비교문학의 대가(大家)로 거현1리 출신인 최재철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가 자신이 나고 자라고, 부모, 형제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시골집을 산방으로 만든 것이다.
최재철 교수는 산방이 한일비교문화와 비교문학에 관해 토론회도 갖고 학생들의 현장체험학습 장소로도 활용되고, 책과 차를 통해 마을 주민과 이웃이 서로 소통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고 있다.
개관1주년에 맞춰 지난 5월에는 시낭송회 및 시인과의 대화, 북 콘서트를 열고 지난 8월 말에는 한일합동 인문학세미나-합평회도 열어 국내 저명한 인사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문가들도 산방으로 불러들였다.
산방은 마을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산방을 찾아오게 하는 매개가 되고 있다. 계간으로 발행하는 소식지로 산방의 소식, 마을의 소식,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외부에 알리고 있다. 도서관이 있어 사람들을 마을로 불러들이고 있다. 향후 이 작은 도서관 산방을 필수 관광지로 꼽는 여행객들이 생겨날 지도 모른다. 입장을 위해 장시간 도서관 밖에서 줄서서 기다리는 진풍경도 상상해본다
문화예술 주민 자조모임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 우리동네 구석구석은 거현산방 탐방을 끝으로 11개 읍면 역사문화유적 및 생활문화유산 공부하기를 모두 마무리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