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주민 자조모임…마로·탄부면 탐방
영동의 자계예술촌이 추진하는 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본사인 주간 보은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우리지역의 지정, 비지정 문화재와 생활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가 운영되고 있다.
우리 동네 탐방 원정대는 보은에 살면서도 군내 구석구석을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는 가운데 이번 사업을 통해 동네 구석구석의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애향심을 키우고 문화재의 소중함과 조상의 지혜와 슬기를 배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지난 4일에는 보은의 마로면과 탄부면의 구석구석을 탐방했다. 지역문화를 탐색하겠다고 나선 우리동네 탐방원정대원들은 이치현 대원이 탐방지에 대한 소개 설명을 들으며 보은학의 기초가 될 지식 쌓기에 열정을 보였다.
이날 마로면은 구씨 입향조인 구수복 선생의 유적인 고봉정사와 최수성 선생이 기거했던 원정리 강교, 그리고 흑연탄광지였던 성하상사 마로광업소, 원정2리 보리골의 선돌, 한중리 윤여익 충신문, 마로면 관기리 왕래원터, 관기리 한국통신 사원아파트, 송현리 왕래재와 칠성바위(지석묘군), 갈평2리 빨래터, 적암리 위성지구국터, 적바위 등 많은 역사문화유적지와 생활문화유산을 살펴봤다.
탄부면에서는 임한리 솔밭에 있는 유영찬씨 영세불망비, 당우리 이명백 장군 충신각, 구암리 구바우와 지석묘군, 하장리 익재영당, 벽지리 찬샘, 덕동리 이명백 장군 묘소, 사직리 공동우물을 탐방지로 정해 둘러봤다.
#동남부의 중심지 마로면
보은읍이 군청 소재지로 지역의 중심이라면 서쪽 중심지는 회인면, 마로면은 동남쪽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마로면은 2013년 3월까지만 해도 보은읍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던 곳이다. 당시 마로면은 2천575명이었고, 그 뒤를 이어 삼승면은 2천554명. 삼승면보다 20명이 더 많았다. 한 달 만인 그4월부터 삼승면이 마로면을 3명 앞지른 이후 삼승면이 계속 2위 자리를 유지하고 마로면은 3번째로 떨어지고 고령화 지수도 높다.
그러나 마로면은 그나마 상가가 활성화 된 지역이다. 인구가 적으니 여전히 썰렁하긴 하지만 점심시간 관기리를 방문하면 썰렁했던 관기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가 중심 도로변이 주차장으로 변할 정도다.
작은 시골지역인데도 불구하고 한식당, 중식당, 양식당, 분식집, 여기에 카페 등 다양한 메뉴를 조리하는 음식점이 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활성화된 식당 모두 맛에서 뛰어나 읍내는 물론 전국에서 식도락가들이 찾는다.
관기리는 관광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읍내와도 거리가 매우 먼데도 일부러 점심때마다 식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 먹거리는 마로면이 차별화 할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구감소 고령화로 인구소멸로 이어지며 지방소멸을 앞당기게 되는 절체절명의 시기다. 자리잡은 먹거리 명소를 잘 활용하면 관기리, 마로면은 발전가능성이 있음을 기대할 수 있다.
#마로면은 공민왕이 3개월간 살았던 곳
고려말 개혁군주였던 공민왕과 얽힌 전설이 많은 곳이 마로면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적이 왕래원, 왕래재, 그리고 일제강점기 마로면으로 통합된 왕래면이란 행정구역이 그것이다.
제2의 홍건적난으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개경에서 북주(지금의 안동)로 피난했다. 이후 고려의 장군들이 홍건적을 대파해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가게 됐고 귀경하던 중 이제는 내부 반란이 일어나면서 공민왕은 마로면 관터(지금의 관기리)에서 3개월을 묵었다. 머무는 동안 공민왕은 왕래원터(관터)에서 정사를 이어갔다. 죄수를 가두는 감옥을 지었고 사창(社倉)도 지었다. 감옥은 관기2리(사여리)에 지은 것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감옥 옥(獄)자를 쓰는 옥관모루(옥관머리, 옥갈머리)라는 지명이 있다. 위치는 고봉정사 앞 도로를 따라 기대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의 임야 골짜기다. 곡물 대여 기관이었던 사창은 관기1리와 인접한 수문1리에 있었다고 한다.
공민왕이 머물렀던 왕래원터는 관기리 어디쯤인지 정확하게 위치는 알지못한다. 다만 마로면사무소(현 행정복지센터) 맞은 편 골목에 왕래여관이 있었다.
만약 왕래원터가 확인된다면 고증을 거쳐 원터를 복원해서 사적지로 만들면 명소로 각광을 받고 관터가 더 유명해지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왕래재는 소여리 큰말에서 송현리 윗 솔고개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도로가 개설되지 않고 또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 소여리와 세중권역의 주민들은 관기시장, 그리고 보덕중학교를 가려면 멀리 돌아야 하기때문에 송현리 산1번지를 통하는 소여리간 왕래재가 주 이동로였다고 한다. 왕래재를 내려와 송현리에 닿는 선미들과 송현리 마을사이의 적암천에 있는 다리이름도 왕래교다. 탐방대원들은 마로면에 공민왕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정확하게 유적지가 정리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보은 유학자들의 정신이 담긴 고봉정사
고봉정사는 조선 유학의 정신을 구현하고 후학을 길러냈던 곳으로 마로면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유적이다.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고봉을 뒤로하고 지었으며 충북지방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고봉정사(孤峯亭舍)는 처음 충암 김정이 공부할 때 자주 찾아가서 경관을 감상하면서 이곳을 ‘고봉(孤峰)’ 이라 했고, 나중에 자기의 호로 삼기도 했다. 마로면 원정리에 기거하던 원정 최수성도 이곳을 사랑해 산봉우리 위에 ‘고봉정(孤峰亭)’ 을 짓고 음영(吟詠)을 즐겼다.
후에 관기리의 병암 구수복이 기묘사화 후 이곳에 은거한 뒤, 자주 찾아와 친구들과 어울려 시를 읊고, 담소하며 즐겼다고 한다. 고봉정사 현판의 필체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것으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경내에는 매우 특이한 보갑석(譜匣石)이 보존돼 오고 있다. 능성 구씨 문중에서 족보를 안전하게 영구 보존하기 위해 땅속에 족보를 보관하고, 그 위에 ‘능성구씨보갑(陵城具氏譜匣)’ 이라고 새긴 비를 세웠다.
고봉정사를 세웠던 조선시대로 돌아가보면 아름다운 공간이었음이 유추된다. 수백년 수령의 나무와 고봉정사가 어우러지고 백사장이 펼쳐진 넓은 삼가천, 고봉정 등 풍경은 선비들이 학문을 수련하면서도 지금의 표현대로라면 놀멍, 숲멍, 물멍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대원들은 주변을 돌아보는 동안 선비들이 글읽는 소리, 유유자적하던 모습이 그려진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봉 정상에 있었던 고봉정은 없어졌다가 민선 4기 마로면 기대리 출신인 이향래 군수가 복원했다. 이 정자는 자세히 보아야 할 정도로 정상의 숲속에 숨어 있다.
최수성 선생의 호를 마을 이름으로 쓴 원정리에는 이곳에 은둔해 있던 최수성 선생과 관련된는 유적이 있다. 원징이 들이 그것이고 강교(矼橋)가 그것이다. 특히 강교는 최수성이 주민들이 마을 앞 내(보청천)를 건너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징검다리를 음양석으로 놓았기 때문에 400여년이 지나서도 요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원정리에 돌다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원정리와 기대리 선애빌 사이 보청천에 놓인 세월교를 가리키는 듯 하다.
원정리 탑산리에 삼층석탑이 있는데 충북 유형문화재 118호이다. 탄광을 지나야 하는데 사유지여서 입구를 막고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자료에 의하면 석탑은 조성기법이 신라형에 따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됐으며, 1982년 해체 복원됐다.
또 앞서 언급된 흑연탄광은 1917년부터 일본사람이 채광했던 곳이다. 이후 한일광업 주식회사가 1958년부터 흑연을 채광하다가 1962년 10월 성하상사(주)가 광업권을 이전받아 운영하다가 2010년 7월 석탄산업합리화 조치로 광업 사업을 종료하면서 폐광됐다. 자방도로에서 옥천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탄광에서 무연탄을 실어내는 갱도출구가 도로변으로 연결돼 있다. 원정리에서 캐낸 무연탄은 영동의 황간역에 집산돼 유통됐다. 갱내 쪽으로 다가가니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갱내에서 흘러나오는 갱내수도 차다. 대원들은 갱도쪽으로 다가가 지역을 탐방하며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식혔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지하탄광의 갱도는 저장 공간으로서는 맞춤형이다. 농산물로 만든 식품의 저장고로 활용되는 것은 타 지역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2010년 7월 석탄산업 합리화에 의해 원정리 탄광은 폐광됐다. 현재는 도로변에 세워둔 성하상사 마로광업소 표지판만이 이곳에 탄광이 있었음을 알릴뿐이다.
원정리는 논 한가운데 우뚝 서 있던 500여년 수령의 느티나무로 유명한 곳이다. 느티나무와 들녘, 그리고 낮은 산 능선이 어우러진 풍광에 열광하는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아와 그들이 찍은 사진들이 어디까지 퍼졌을지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소개되고 영화와 드라마까지 촬영한 명소다. 하지만 일부러 죽인 것처럼 말라죽기 시작해 결국은 2021년 4월 보호수에서 해제하고 고사목을 뽑아버렸다. 현재는 터만 남아있고 도로변에는 MBC 수목드라마 ‘로드 넘버원’과 영화 ‘달콤한 인생’을 촬영지라는 낡은 안내간판이 명소였음을 알리고 있다.
경북과 충북의 도계 마을인 한중리의 윤여익 선생의 충신문도 찾아봤다. 윤여익 선생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 선생의 의병에 참여해 충남 금산에서 싸우다 700의사와 함께 순절했고 선생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이다.
윤여익 선생은 의병들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를 지내 넋을 추모하고 충성심을 기리는 수한면 차정리의 후율사에 위패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탐방대원들은 윤여익 선생의 위패는 왜 후율사에 모시지 않았는지 궁금하다며 향후 자료를 확인해 후율사에 위패를 모셔 추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송현리 지석묘군은 흔히 말하는 고인돌 무더기다. 보호수인 느티나무 인근에 있는데 주위에 7개바위가 있어서 주민들은 칠성바위라 불렀다. 과거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 이 지석묘에 와서 빌었을 정도로 주민들은 이 바위를 매우 신성시했다.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 토속신앙 토속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세탁기가 빨래를 하는 요즘이지만 비누칠하고 방망이로 팡팡 때려서 빨래를 빨면 깨끗하고 개운하겠다는 생각을 가끔한다. 갈평2리 빨래터는 그런 곳이었다. 마을 위쪽의 구병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땅 위와 땅속으로 반복적으로 흐르면서 정화돼 마을 입구에는 그 어느 곳보다 물맛이 좋고 물이 맑은 두레박 샘이 만들어졌고 빨래터도 만들어졌다.
1980년대에 간이상수도를 만들면서 두레박 샘은 없애고 빨래터를 정비했다. 수질이 좋고 깨끗해서 빨래를 빠는 것 말고 지금도 채소를 씻는다고 한다.
#곡창지대 탄부면내 곳곳에 유적 있어
보은군내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탄부면에서는 당우리 이명백 장군의 충신각과 덕동리 이명백 장군 묘소, 구암리 구바우와 지석묘군, 하장리 익재영당, 벽지리 찬샘, 사직리 공동우물을 둘러봤다.
탄부면내 마을로 구암리가 있다. 이곳에는 지명의 유래를 마을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을회관 인근 이상규씨 집 마당에 있는 구(龜)바위다.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구암(龜巖), 구바우, 귀바우라 불렸다고 전해졌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구암리를 큰 바위 아홉 개가 있어 구암(九巖)이라 변경했다. 일제가 마을이름을 왜곡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대단위 경지정리 때 아홉 개의 바위 중 4개가 없어지고 현재는 5개만 남았다. 기록에는 이 바위를 지석묘라는 주장도 있다.
하장리에는 익재 이제현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 있다. 영정은 건물 안에 액자처럼 또는 족자처럼 그대로 걸려있는 게 아니다. 영당의 방문을 열면 다시 그 안에 큰 여닫이문 두짝이 달려 있는데 영정은 그 안에 감춰져 있다 참 특이하다.
원래 이곳에 영정 진품이 있었는데 도난당했었고 수배 끝에 찾아서 영정 진품은 국보110호로 지정,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현재 있는 영정은 정본을 모사한 부본(副本)인데 이 또한 충북 유형문화재이다.
익재영당은 2층 높이의 건물에 염수제(念修齊)란 현판이 걸려있다. 누문 형태의 염수제는 1938년 영당을 중수할 때 세운 것이다. 위층은 제실로 사용하기 위한 공간을 두고 있다. 1504년 연산군 10년에 이제현의 후손인 이사균이 폐비 윤씨 복위를 반대하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지은 것이다.
이날 경주이씨 문중으로 탄부면 하장리의 이하영씨가 나와 영당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설명을 곁들여 탐방대원들의 이해를 높여줬다.
하장리에 경주이씨의 유적이 있다면 덕동리에는 가평이씨의 유적이 있다.
보은인인 가평이씨 이명백 장군의 묘소 등 유적은 이재현 탄부면 덕동1리 이장의 설명을 들었다. 원래 마로면 원정리에 있었던 묘소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고 묘 앞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명백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 마로면 적암리에서 왜군의 진로를 막고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다. 승병 영규대사와 합세해 청주성을 공격해 청주성을 탈환하는 대승을 거둔 바 있다.
또 선산, 인동 등 낙동강 일대에서 왜적들을 격멸한 후 마로면 적암리로 회군하다 행주산성에서 패한 왜군과 맞닥뜨려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대적했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순조 12년인 1812년에 명정돼 처음 구암리에 정문을 세웠던 충신각은 1970년 당우리 보덕중학교 정문 앞으로 이전했다. 장군의 위패는 차정리 후율사에 모셔져 있고 춘추로 제향을 올려 애국심을 기리고 있다.
벽지리 찬샘은 그 유래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된 샘이다, 계곡의 바위틈에서 배어나오는 물이 샘을 이루는데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의학이 발전되지 않았던 과거 많은 사람들이 샘물을 이용해 피부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특히 여름철 땀띠치료를 위해 찾는 사람이 많았다. 과거 경상도에 살던 사람이 종기 치료차 충주 온천을 가던 중 벽지 찬샘 물로 목욕을 했는데 종기가 말라붙으며 피부병을 말끔하게 고쳤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의 피부병 환자들이 벽지로 찾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여름철 내내 땀띠로 고통스러워했던 기자의 조카도 매년 여름이면 벽지 찬샘에서 목욕을 하고통에 물을 떠서 가기도 했다.
모든 탐방을 마치고 보은으로 들어오는 길에는 탄부면 사직리 마을 광장 쪽에 있는 공동우물을 살펴봤다. 외양은 우물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을까 싶게 허름했지만 생각보다 물이 맑고 양도 많았다. 뚜껑으로 덮어놓은 우물은 두레박 샘처럼 깊지 않았고 바가지로 퍼서 사용할 수 있는 샘이었다.
과거 펌프가 나오기 전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공동우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물을 퍼서 지게로 저 나르고, 아낙들이 머리로 이고 나르기도 하는 등 생명수인 물을 집까지 가져가는 것도 고된 가사노동이었다.
어른들의 경험담으로는 물을 나르는데도 리듬을 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뚜껑이 없기 때문에 출렁거리다 물이 그릇 밖으로 튀고 쏟아지기 일쑤여서 초보자는 그릇의 7, 8부쯤 담았어도 집까지 가다 보면 반 정도 남거나 그 아래로 남기도 했다고.
수도꼭지만 틀면 어디서든 필요할 때마다 편리하게 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어깨에 지고 머리로 이고 날랐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고된 삶을 우물에서 느껴볼 수 있었다.
한낮 온도가 33, 4도인 이날 더위가 옛사람들의 삶이 더욱 무덥게 느껴졌다.
마로면과 탄부면을 구석구석 살핀 이날 탐방은 손을 씻으면 좋겠다, 목에 두른 땀에 젖은 손수건을 빨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때맞춰 갈평 2리 빨래터를 들렀고, 산골 바위틈에서 물이 나는 벽지 찬샘을 들렀고, 사직리 공동우물을 들렀다. 물의 소중함을 느끼며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우리동네 탐방원정대 동네구석구석은 또 다른 곳을 알아가는 여행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