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탐방 원정대] 보존할 가치 높은 근대 문화유산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 보존할 가치 높은 근대 문화유산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
  • 송진선 기자
  • 승인 2024.07.18 12:21
  • 호수 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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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탐방 원정대’ 동네 구석구석 누비며 문화자원 기록
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주민 자조모임…보은읍 탐방

영동의 자계예술촌이 추진하는 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본사인 주간 보은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우리지역의 지정, 비지정 문화재와 생활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가 운영되고 있다.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는 이번 사업을 통해 동네 구석구석의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애향심을 키우고 문화재의 소중함과 조상의 지혜와 슬기를 배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우리동네 원정 탐방대의 이번 탐방지역은 보은읍. 지난 7일 최규인 향토문화연구회 회원을 중심 설명자로 해서 근현대 생활문화유산으로 보은읍 장속리 노루실 마을의 현존 담배건조실, 장신1리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고, 죽전2리 잠실마을의 공동우물, 보은양조장 술도가를 찾아가 근현대의 문화를 향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조선시대의 문화유산인 보은읍 수정리 박삼길 묘소, 지산리 김수온 부조묘와 보은읍 금굴리 은사평, 누청리 사괴정을 찾았다.

새벽부터 비가 쏟아지고 하루종일 계속된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무더위 속에 탐방하는 것보다 차라리 비가 내리면 시원하니까 더 잘됐다며 대원들은 저벅거리는 빗속 탐방을 포기하지 않았다.
탐방을 끝낸 대원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생활문화 유산이나 농경문화유산은 국가나 지방정부에서 정한 문화재가 아니더라도 지자체 차원에서 조례를 통해 보호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 조치하지 않으면 근대 100년 전후 역사 문화유산은 빠른 시일안에 훼손되거나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것. 후손들이 조상의 지혜나 그때 그 시절의 생활상을 책에서나 보게 될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때 그 시절 담배막을 아십니까

요즘 보기드문 보은읍 장속리 노루실 마을에 있는 잎담배 건조실이다. 내부는 소 외양간으로 했다가 창고로 사용하는 등 변형이 됐지만 외부는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벽체에 사선으로 매단 사다리는 올라가서 담뱃잎이 말랐는지 확인하던 중요한 도구였다.
지금도 잎담배를 경작하는 농가가 있다. 요즘은 과거와 달리 벌크건조실을 이용해 건조한다. 사진은 산외면 길탕리의 담배 경작지의 모습이다. 아래로 부터 담배잎을 따서 말리는데 밑동이 어느 정도 보이면 농민들은 골 안에 들깨나 콩을 심기도 하고 또다른 농민들은 담배를 다 따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김장용 배추를 심는 등 이모작으로 경지의 효율성을 높인다.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다’ 보은읍 탐방은 농경문화 유산 및 생활문화유산을 근접해서 볼 수 있었다는 게 큰 수확이었다.
생활문화유산으로 살펴본 담배건조실, 100년 넘은 창고, 공동우물, 술도가 등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유산이 없었다.

시골에서 성장한 지금 40대 중후반이나 50대 이후는 담배건조실을 거의 알 것이다. 7, 80년대 농촌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시설물이었다. 2층 건물이 없었던 당시 동네에서 가장 고층 건물은 단연 담배건조실. 흙장을 쌓아 벽체를 만들고 사각형의 지붕엔 슬레이트를 얹었다. 건조실 내부 바닥에는 보일러 배관처럼 대형 연통이 깔려있었다.

연료는 무연탄. 물로 갠 무연탄을 활활타는 화덕 속으로 집어넣으면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열기가 ‘훅~’ 하고 밖으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젖은 무연탄을 빨아들이며 불이 타다닥 붙는다. 초기엔 온도를 살살 올리고 막바지로 가면서 시간마다 연료를 집어넣어 열기가 극에 달할 정도로 온도를 끌어올려 5, 6일간 불을 때 담배를 건조시킨다. 그래야 잎담배의 색깔이 황금 빛으로 잘 건조되는 것이다.

담배건조실은 매우 과학적이다. 지붕은 작은 지붕과 본 지붕으로 두 개를 설치하는데 두 개의 지붕사이에 공간을 둬 열기가 밖으로 빠질 수 있도록 하면서 윗부분에 매단 잎담배까지 잘 마를 수 있도록 했다. 아니면 지붕 하나로 하는데 윗부문에 구멍을 크게 내서 열기가 빠져나가게 한다.
건조상태를 확인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건조실 꼭대기 쪽으로 사다리를 매달아 그곳까지 올라가서 위에서 건조상태를 살필 수 있도록 했다. 또 벽에 술치한 유리창을 통해 건조상태를 살필 수 있도록 했다.

기자가 사는 마로면 갈평1리는 7, 80년대 20~30% 육박할 정도로 잎담배 경작농가가 많았다. 당시 동네 이장이 있었지만 이장 ‘끗발’보다는 담배총대(마을 담배경작농가 중의 대표자) 끗발이 훨씬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농가가 잎담배 농사를 선호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우선 농가가 시장에 내다팔 걱정이 없었다. 전매청(지금의 한국담배인삼공사, KT&G)에서 품질에 따른 등급을 매겨 일괄 수매했다. 초기 우선 자금을 융통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돈의 씨가 마를 시기 내다 팔 곡식이 변변치 않은 농민들은 자식들 학비 지원이나 용돈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한집당 20단(6천평) 이상 담배경작을 하는 농가도 많았다.

새벽 5시 훨씬 전 어슴푸레 하게 사물이 보일 정도만 되면 어른들은 담뱃잎 수확을 위해 밭으로 나갔다. 어린 자녀들은 어른들이 따놓은 담뱃잎을 골 밖으로 안아날랐다. 끈적끈적한 담뱃진으로 옷은 엉망이다. 그 시절 한집에 자녀들이 4, 5명 많은 집은 6명, 7명이 있으니 어린 일꾼들이 주말, 휴일엔 어김없이 담배를 따고 담배를 엮어 다는 날이었다. 그래서 여름방학, 주말이 좋으면서도 담배를 안아내고 엮어서 달 일을 생각하면 가장 싫은 날이기도 했다. 농촌 소년 보조농들이 가진 설움 담긴 추억이다. 그럼에도 가성비 높은 작목을 선택한 부모님 덕택에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대동소이할 것 같은 추억이 담긴 담배건조실은 지은 지 40년 이상된 보은읍 장속1리 노루실 마을 이문용(76)·김광실(73) 부부 소유의 것을 탐방했다. 15단보(4천500평) 담배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재래식의 담배건조실을 이용해 담배농사를 짓다가 현대화된 담배벌크를 이용해 담배농사를 지어 아들 둘 공부를 다 가르친 후 담배농사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이문용씨는 쓰지 않는 담배건조실은 철골재를 덧대 중심을 잡게 하고 빗물이 들이치는 하단부는 시멘트 콘크리트를 발라 흙집 단배조실의 견고성을 유지하게 만들다.

이문용씨는 옛날 재래식 담배건조실은 소를 키우는 소막으로도 사용했고 농기구, 비료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했다. 지금은 소는 키우지 않지만 여전히 비료 등 많은 농사용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로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다음 장신리 보은경찰서 옆쪽의 창고는 처음 보는 건축기법에 놀라움을 갖게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은 창고

외부에서만 보면 허름한 그냥 창고이지만 1930년경 지어진 창고다. 창고 외부는 시멘트를 발랐고 지붕은 나무 판자대신 천막을 씌워 보강했다.

재래식 창고는 흙에 볏짚을 썰어넣고 찍은 흙장을 차곡차곡 쌓아서 벽체를 세우고 그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서까래를 얹어 지붕을 씌웠다. 아니면 흙장 대신 수수깡이나 나뭇가지를 엮어 벽체를 세우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견고하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이 사는 집도 이런 방식으로 지은 곳이 많았다. 부서져 있는 오래된 집을 보면 흙장집이나 나뭇가지 벽체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번 원정대의 탐방을 통해 찾은 창고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경 지은 것이다. 지붕은 양철을 얹었고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벽체의 외부는 시멘트 콘크리트를 발랐고 내부는 흙으로 발랐다. 다른 재래식 창고와 차이는 내부에 갈매기 모양으로 나무토막을 덧댄 점이다. 나뭇가지로 벽체를 만든 것이어서 구조적으로 견고성이 떨어지지만 나무토막을 갈매기 모양으로 못을 박으니 구조적으로 안전이 보강됨으로써 창고가 견고하게 유지돼 100년이 넘어도 끄떡없는 것으로 보였다.

창고 내부 벽면의 모습이다. 흙으로 마감한 후 각목을 댔는데 벽체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덕분에 100년을 훌쩍 넘은 세세월을 끄떡없이 견디고 있다.

 

창고 천정의 모습이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이다. 그 견고함이
 100년이 넘는 세월을 지탱하고 있다.

나락창고로 쓰였을 법한 창고는 40여평 규모. 창고의 크기나 건축 자재 등을 보면 상당한 재력을 보유한 소유자인 것으로 보인다.
창고주는 일제강점기 경북 상주군수와 안동군수를 지냈고 해방 후에는 초대 보은교육감을 지낸 고 최병철씨. 설명을 담당한 최규인 보은군향토문화연구회 전 회장의 종조부다. 현재는 최 전 회장의 육촌 형 소유라고 한다.

상당한 지주였던 최 전 회장의 증조부는 경찰서와 교육청 그리고 뒤쪽으로 삼성연립 현대연립 삼성슈퍼 위쪽의 농경지 등 장신리 일대를 거의 소유하고 있어서 최규인 전 회장 중조부의 땅을 밟지 않으면 못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

지금은 철거된 교육지원청 옆에 있었던 최규인 전 회장의 큰 집은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했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주택은 일반 한옥구조인데 내부에 일본식 목욕탕이 있는 시대상을 반영한 건물이어서 충북 문화재 전문위원이 문화재로 추천을 했을 정도였다고. 하지만 소유자의 반대로 문화재 지정은 무산됐으며, 오랫동안 방치되는 바람에 건물은 부서졌고 결국 철거하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최규인 전 회장은 과거의 산물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카페나 미술관 등으로 재생시키는 곳이 많다며 일제강점기 때 지은 창고를 카페같은 것으로 활용하면 볼거리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죽전2리 잠실마을 웃골샘

보은읍 죽전2리 잠실마을의 공동샘물이다.  지금도 주민들의 먹는 물로 그리고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죽전리 웃골샘은 요즘 보기 힘든 먹는 물로 활용되는 샘이다.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짐작하고 있는 가운데 물은 바위틈에서 나오는 자연용천수다. 그래서 장마철이면 물의 양이 더 많아지고 가물때는 물의 양이 줄어들긴 하지만 물이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현재의 우물 모습은 보은군이 1990년 약수터 정비사업을 통해 이뤄진 것. 석재 조형물인 개구리 또는 두꺼비 입에서 연신 물이 나오고 바닥에는 손빨래를 할 수 있도록 빨래판도 붙였다. 식수뿐만 아니라 나물도 씻고, 빨래도 빨고,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을 수 있지만, 현재는 삼산리에 사는 주민들도 통을 가지고 와서 물을 떠 갈 정도로 주로 먹는 물로 사용하고 있다.
보은군이 정기적으로 수질검사를 하고 성적표를 부착해 주민들이 안심하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고 관리하고 있다.

곽동균 노인회장은 “물이 모이는 관정을 1.5미터 깊이로 만들고 안에는 태양광 발전을 이용해 자외선 살균 소독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달았고 또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관정안을 청소해서 먹는 물 이용에 지장이 없도록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탐방원정대원들은 “상수도가 공급되지 않았던 시절 우물이나 펌프를 이용해 밥을 해먹었던 기억이 있다”며 “아직도 우물이 남아있고 또 음용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게 더욱 놀랍다”는 소감을 밝혔다.

#백년 넘는 기업 보은양조장 술도가

삼산양조장에서 처음 시작된 술도가는 죽전 양조장까지 생기는 등 양조장이 사업적으로 번창했다가 후에 두개의 양조장이 통폐합되면서 보은양조장이란 이름으로 운영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은읍 삼산1리에 있는 보은양조장은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양조장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보은읍 장신리에 거주하는 보은향토문화연구회 최규인 전 회장은 자신의 조부가 일제강점기 삼산리에서 삼산양조장을 운영했었고 성심목욕탕과 연접한 4층규모의 주상복합 연립주택 자리가 최초 양조장 자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고 배동연씨가 보은읍 죽전리에서 죽전 양조장을 운영하다 삼산양조장을 매입, 통합하면서 보은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 배동연씨가 운영하던 보은양조장은 88올림픽이 열린 1988년 조카인 배종환씨가 인수했고 개인사정으로 34년 운영을 끝으로 2022년엔 소주명인, 막걸리 고수인 이현승씨가 인수했다. 한 가계가 대를 잇는 기업은 아니지만 보은양조장 술도가는 그럼에도 백년이 넘는 노포다.

현재 보은양조장을 운영하는 이현승씨는 2013년까지도 속리산면 상판리 속리산면사무소 맞은편에서 속리산대추막걸리와 속리산 동주라는 브랜드의 술을 만들어 팔던 바로 그 사람이다. 대추축제때 속리산 동주, 대추막걸리가 크게 인기를 끌었고 특히 속리산 동주의 맛을 지금도 기억한다는 애주가들이 많을 정도. 현재는 보은읍 삼산리 보은양조장에서 시판 중인 쌀막걸리, 대추막걸리외에도 증류주, 와인 등 다양한 종류의 주류를 만들어 시음을 끝냈고 조만간 시판 계획이다. 보은양조장 생산 술맛에 취할 날만 남았다.

보은양조장 임원기 전무가 발효 중인 막걸리를 저으며 상태를 살피고 있다.

그리고 이현승씨가 인수한 지 1년만인 지난해 보은양조장의 보은쌀 생막걸리는 전국 막걸리 품평대회에서 금상을 수상, 맛있는 막걸리로 평가되며 이름을 날리고 있다.

탐방대원들이 임원기 전무로 부터 보은양조장에서 빚는 막걸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원정탐방대원들은 술도가에서 ‘뽀글뽀글’ 기포가 생기며 발효되고 있는 현장도 구경하고 빗속에서도 강행한 탐방으로 인한 고단함은 맛있게 익은 막걸리 한 잔으로 풀었다.

탐방대원들이 보은양조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막거리 외에 정종류 등 다양한 술맛을 음미했다.

군내 11개읍면마다 있던 양조장이 모두 사라지고 현재는 보은양조장 한 곳만 남았다. 소중한 문화자산인 것이다.

없어진 외속리 양조장과 관기양조장에서 사용했던 박스도 보은양조장에 보관돼 있다. 향후 보은양조장 막거리 박물관을 지을 경우 소중한 전시 자료로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생활문화유산 탐방에 이어 역사문화유적 탐방도 이어갔다

#수정리 박삼길의 묘비와 은사들 어원 금굴 소나무 숲
보은읍 수정리에는 면천 박씨인 박삼길 선생의 묘와 묘 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박삼길 선생의 묘비가 있다.

보은읍 수정리 면천 박씨인 박삼길 선생의 묘전에 세워진 묘비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비문에 금굴리 지명의 유래가 된 은사평(들)이란 지명이 나온다. 지금도 금굴1리는 은사들 마을이라 불린다.

최규인 보은향토문화연구회 전 회장이 박삼길 선생에 대해 설명했는데 박삼길(朴三吉) 선생은 조선조 성종~연산군~중종때 인물로 종2품의 벼슬을 지냈으며 연산군 때 왕의 만류에도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보은 수정리로 들어와 은거했다. 선생은 1509년 작고했는데 사후 150년이 지난 때 후세의 인물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박삼길 선생의 묘비문을 썼는데 바로 이 묘비에 ‘박삼길 선생이 은사평(들)에 살았는데…’라고 적고 있다.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1650년대에 지금 농협장례식장이 있는 마을을 금굴리 은사평이라 부르고 있는데 출처를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보은군은 은사평의 소나무 87그루와 버드나무 5그루 등 숲이 사유지여서 원형보전에 어려움을 겪자 2009년 이곳을 사들여 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슾길과 정자도 지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지난 2022년에는 산림청이 국가 산림문화 자산으로 지정했다.

금굴리 은사평이라 불리는 곳에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보은군이 보호림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산림청도 이곳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이날 탐방원정대원들은 보은군이 쉼터로 지어놓은 정자에 이름이 없다며 과거 선비들이 은사정에 모여 시를 노래하고 학문을 논하며 숨어지냈다는 문헌을 바탕으로 은사정(隱士亭)이라 명명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지산리 김수온부조묘
보은읍 지산1리 마을안 임야와 연접해 있는 김수온부조묘(金守溫不祧廟)는 충북지방유형문화유산이다. 문화재 안내판이 낡았고 또 정작 부조묘 입구에는 설치되지 않아 처음 방문하는 경우 헷갈리기 쉬웠다. 김수온 부조묘는 1487년인 조선 성종 18년 보은읍 종곡리에 창건된 것을 1664년 현종 5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으로 옮겼다. 이후 1947년 후손 김태현이 중수했고 1981년 해체복원했다.

보은읍 지산리에 있는 김수온 부조묘의 모습이다. 탐방대원들이 부조묘 주변을 탐방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부조묘는 불천위(不遷位) 신주를 둔 사당을 의미하고 제를 지내는 곳이다. 즉 김수온부조묘는 김수온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제를 지내는 곳인 셈이다.
김수온 선생은 영산 김씨로 한글창제의 주역으로 알려진 신미대사(속명 김수성)의 동생이다. 1438년(세종 20) 진사과, 3년 뒤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상주목사,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세종으로부터 문재(文才)로 인정받아 집현전 학자로 임명되었고, 성삼문, 신숙주, 이석형 등과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승려인 맏형 신미의 영향으로 불교에도 깊은 지식을 가져 불경 번역과 불사에 관계된 많은 글을 남겼으며,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세종과 세조 때의 편찬 및 번역사업에 공헌한 인물이다.

#누청리 네귀퉁이 느티나무와 사괴정

정자가 세우고 네 귀퉁이에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기록돼 있다. 느티나무가 울울창창하게 커서 숲을 이우고 있는 사괴정(四槐亭)의 모습이다. 보이는 비석에는 사괴정을 세운 두 인물을 기록하고 있다.

사괴정(四槐亭)은 보은읍 누청리에 있는 경주 김씨(金氏)와 전의 이씨(李氏) 종중 소유의 비지정 문화재이다.

조선 선조때 경주 김씨인 송촌 김성원(金聲遠) 선생과 전의 이씨인 두산 이려(李勵 선생이 두 문중의 친의를 더욱 돈독하기를 기약하며 정자를 세운 후 내 귀퉁이에 느티나무를 심고 사괴정이라 했다고 한다.

우의가 돈독했던 두 사람은 임진왜란에서 스승인 중봉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자 현종은 김성원에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이려에게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라는 관직을 증직(贈職, 사후 관직 부여)했다. 이후 1717년 숙종 43년에는 두 사람 모두 충의로 명정되자 정문을 세우도록 해서 두 사람이 세운 정자에 사액(賜額)하고 정자의 칸을 막아 각각 현판을 설치해놓았다. 정자로 세운 사괴정은 이제는 정자가 아니라 충의 정문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사괴정 뒤에는 후손들이 두 사람의 순의비(殉義碑)를 세워 후손들에게 알리고 있다. 사괴정 내에는 느티나무 외에 수령 500여년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보은군은 은행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은행나무 전체를 담기 위해서는 사괴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촬영해야만 할 정도로 아름드리이다. 

보은군이 설치한 나무 의자가 부서진 채 방치돼 있자 탐방대원들은 의사(義士)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차원에서라도 제대로 관리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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