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보은은 사람까지도 문화재인 역사문화의 본고장
역시 보은은 사람까지도 문화재인 역사문화의 본고장
  • 송진선 기자
  • 승인 2024.07.04 11:17
  • 호수 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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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탐방 원정대’ 동네 구석구석 누비며 문화자원 기록
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주민 자조모임, 속리산·장안지역 탐방

영동의 자계예술촌이 추진하는 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본사인 주간 보은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우리지역의 지정, 비지정 문화재와 생활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가 운영되고 있다.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는 보은에 살면서도 군내 구석구석을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는 가운데 이번 사업을 통해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애향심을 키우고 문화재의 소중함과 조상의 지혜와 슬기를 배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우리동네 원정 탐방대 두 번째 탐방지역은 속리산면과 장안면. 지난 6월 23일 남광우 대장을 중심으로 한 원정대원들은 보은에 살고 있는 국가 및 지방 무형문화유산과 예인, 그리고 속리산 에밀레 도깨비 박물관과 멍에목 성지를 탐방하고 생활문화유산으로 충북문화재자료4호인 선진규 이장의의 우물도 살폈다.
보은에는 무형문화재로 불렸던 국가 무형 문화유산으로 낙화장 김영조 명인과 지방 무형문화유산으로 각자장 박영덕 명인, 목불조각장 하명석 명인, 송로주 임경순 명인이 있다.
우리동네 탐방원정대는 이중 김영조 명인과 박영덕 명인의 작업장을 방문해 면담하며 이들이 문화 유산을 지키고 전승하기 위해 쏟은 열정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우리고장 무형문화재에 대해 공부하며 앎의 깊이를 채우고 자긍심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낙화장 김영조 
보은읍 누청리에 있는 국가무형문화유산 낙화장 김영조 선생은 서울 출신으로 처음 낙화를 접한 것이 1972년이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또 잘 그리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고등학교 미술교사는 미대진학을 권유했다. 하지만 집안형편 상 직업을 가져야 했던 김영조 낙화장은 취업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낸 낙화가 전창진 선생이 운영한 낙화연구소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김영조 낙화장은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동문수학했던 전창진 선생의 여타 제자들보다 뛰어났다. 내다팔 정도로 제품을 잘 그려 별 어려움 없이 불그림을 팔 수 있었다.
그리고 1977년 속리산에 청목화랑이란 기념품점을 연 김영조 낙화장은 한지 대신 나무판을 인두로 지져 낙화 기념품을 만들어 팔았다. 워낙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의 제품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그 덕분에 생활하는데 여유가 생길 정도로 형편도 나아졌다.
상업용 제품으로 낙화를 하면서도 명인의 마음속엔 늘 예술적 가치가 큰 회화인 낙화가 전통예술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늦으면 안되겠다 싶어 2000년 본격적으로 낙화 연구에 들어가 하루 15시간씩 연습하고 습작하느라 엉덩이가 짓무를 정도로 매진했다.
그런 노력 끝에 2009년 제34회 전승공예대전에 ‘낙화촉잔도 12폭 병풍을 출품했는데 특선을 수상했다. 이를 시작으로 김영조 낙화장은 여러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 10여 차례 상을 받으며 낙화의 예술적 가치를 알렸다. 그 덕분에 낙화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있던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도 바로잡았다. 외국에서 열리는 비엔날레, 아트페어 전에도 초대돼 시연하며 대한민국 낙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마침내 2010년 10월에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됐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김영조 낙화장은 국가 무형문화재에 도전 2018년 12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 낙화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디는 쾌거를 기록했다. 낙화를 전통회화로 세우겠다는 꿈을 이룬 것이다.
우리 전통 낙화를 연구·발전시키며 52년간 쉼 없이 한길을 걸어온 김영조 낙화장에게 낙화는 그의 인생이나 다름없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인간승리였던 것.
또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예술의 경우 전승자가 없어 맥이 끊기는 경우 많은데 김영조 낙화장의 집념을 보고 자란 둘째 딸 유진(43)씨가 낙화의 계보를 잇고 있다. 미술을 전공한 유진씨의 실력도 뛰어나 2011년 제36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낙화 화조 8폭 병풍으로 입선을 차지했다. 국가무형유산 낙화장 이수자로 대를 잇고 있다.

#각자장 박영덕 명인
장안면 오창1리에서 운봉서각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영덕 선생이 지방무형문화유산 제28호 각자장으로 지정된 것은 2018년 1월 11일이다. 무형문화유산들이 모두 한우물을 파는 집념을 보이듯이 박영덕 각자장도 서각 입문 30주년만에 무형문화유산 지정 성과를 거뒀다.
각자장은 대량 인출이 필요한 서적을 만들기 위해 책판의 글자와 세밀한 그림을 새김과 동시에 책판의 관리, 보수와 장판(藏板)을 전담하는 장인이다.
1988년 동천서각 송인선 선생 문하에 입문해 전통 각자 기법을 전수받고, 2000년엔 중요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고 오국진 선생에게 금속활자 주조와 책판 제작 기법을 전수받는 등 전통기법을 배웠다.
그 결과 2000년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서각부 장려상, 대한민국 현대서예문인화대전 서예 입선, 충북서예대전 서예 입선, 2009년 제34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각자부문 입선(문화재청 소장-정조대왕 어필 안변 설봉산 석왕사비 목판 10판)했다.
2010년엔 직지세계문자서예대전 서각부 우수상 및 제35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각자부문 입선(단산별곡)했다. 2012년 제37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는 각자부문 특선(문화재청소장-관세음보살 42수 진언 목판11판), 2012년 원주 옻칠공예대전 장려상, 2014년 제39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훈민정음 해례본 33판, 능화판)을 수상했다. 2015년 제40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훈민정음 언해본 책판 및 능화판) 등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이 진가는 날로 빛이 났다.
그동안 삼국유사 목판작업, 서울대 규장각 준천첩 모본 제작, (사)유교문화보존회가 주최한 훈민정음해례본 완질 목판작업 단독 완수, 청남대 대통령 기념관 현판, 영동 국악촌에 있는 천고각 현판을 하는 등 수많은 현판 작업도 수행했다.
슬하의 자식들도 아버지의 길을 걷고 있다. 문화재수리기능사 자격을 취득한 첫째 딸 해원씨는 직지문자서예대전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 공예공모전, 원주 옻칠공예대전에서 입상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를 졸업한 둘째딸 박지원씨도 직지세계문자서예대전과 원주 옻칠공예대전에서 특선했다. 학교 주최로 열린 김홍도 선생의 씨름을 목판으로 새겨 판화한 작품은 규장각에 기증됐다. 막내아들 박성원씨도 충북대학교 목재 종이학과에서 공부하는 등 자녀 모두 기능 전수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송전 정기옥 서예가 및 화가
속리산면 상판리에 거주공간과 작업실이 있는 송전 정기옥 선생은 국전 초대작가로 활동하는 서예가이자 화가다. 특히 사경은 불경의 사경과 변상도계에서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탐방대원들이 찾았던 날은 가는 날이 장날일까? 작업공간과 새로 전시실을 꾸미느라 선생은 바쁘게 움직였다.
전시할 작품은 사경과 변상도뿐만 아니라 한국화, 서예 등 많은 제품이 아직 제자리를 찾지 않은 상태였다. 9월 중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정기옥 선생의 설명을 듣고 전시실에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반영될지 궁금증을 갖게 했다.
초등학교 때 서예를 하고 한동안 아예 붓을 잡지 않았던 정기옥 작가가 다시 붓을 잡은 것은 1995년 문화원 서예교실을 통해 서예를 배우면서다. 시집와서는 양장점을 했을 정도로 하고 싶어하는 것보다 생활이 우선이었는데 다시 서예를 시작하니 묵혀뒀던 재능이 방금 전까지도 글씨를 썼던 사람처럼 필체에 강한 힘이 느껴질 정도로 써내려갔다. 정기옥 선생은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 2003년부터는 서예가로 유명한 초암 김시운 선생에게 사경(寫經)을 배웠다.
또 문화원 한국화 교실에서 한국화를 배우는 등 갖고 있는 소질을 확장 개발해 나갔다. 그 결과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는 서예뿐만 아니라 한국화에서도 특선을 차지하고 서예, 한국화 부문 초대작가로도 등록됐다.
정기옥 작가는 매년 대추축제 기간 단독으로 서예 사경전을 개최할 정도로 작품활동에 매진해 해마다 많은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또 대추골먹그림회 회원전도 주도하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남 양산 통도사 옻반 아카데미에 입문해 옻칠을 이용한 작품활동도 왕성하게 펼쳐 서예, 사경, 변상도, 한국화에서 옥칠작품까지 확장하는 등 작품의 다양성을 높이고 있다,
개인전, 단체전, 그리고 일본, 중국 등 해외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있는 송전 정기옥 작가는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에서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화 부문 서울시의장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에밀레 도깨비 박물관
속리산면 상판리에 위치한 에밀레 도깨비 박물관은 처음 방문한 원정대원이 있을 정도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박물관이 갖고 있는 무게감과 세월의 두께가 더해져 원정대원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을 둘러본 원정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군에서 관심을 갖고 복원에 참여해 지역의 명소 문화상품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에밀레 도깨비박물관은 민속연구가 조자용(趙子庸) 박사가 1967년 서울 화곡동에 건립했다가 1983년 이곳에 옮겨 세운 것으로 국내 최대 민화 전시관이자 도깨비 관련 조각과 소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희귀 귀면와(鬼面瓦·도깨비 얼굴을 새겨넣은 기와)와 사료적 가치가 높은 호랑이 민화, 도깨비 목조각도 제법 있다.
1만1천㎡의 부지에 전통 한옥 형태의 전시관과 숙소 캠프장이 있어서 도깨비 체험객으로 청소년 캠프를 운영하고 10월 3일 개천절에 열었던 국중대회는 외국인들도 참여해 한류를 체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8년 보은 대수해 때 큰 피해를 입고 조자용 박사가 2천년 타계하면서 오랫동안 방치됐고 2014년엔 엎친데 덮친 격으로 화재까지 발생하면서 전통문화의 산실이었던 도깨비 에밀레 박물관 그야말로 흉물이 되다시피했다.
친인척과 민속학계는 시간이 갈수록 폐허로 변해가는 안타까워 하고 박물관을 지켜내기 위해 조자용 박사의 정신문화를 계승하는 조자용민문화연구회(회장 이만동) 조직했다. 복원추진위원회는 무너진 시설을 정리하고, 수장고 등에 남아있던 민화 등을 수습하고 전시공간도 복원하는 등 하나하나 제자리로 돌려놓은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이곳과 연을 맺도록 박물관 안 캠프파이어장 주변에는 오토캠프를 할 수 있게 기반을 닦았고 카페도 만들어 음료도 팔고 그림 등 작품전시회도 갖고 포럼도 열고 또 팔각전도 보수해 음악회도 개최했다. 외부인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문화공간으로서의 지평을 넓히면서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다.
특히 올해는 주식회사 도깨비만인보를 설립해 보은군신활력플러스사업에 참여하며 더욱 활발한 문화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에밀레 박물관의 낮도깨비와 밤도깨비들이 깨어나 본격적으로 활동하면 속리산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우뚝 설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국 천주교 멍에목(구병리) 성지
속리산면 구병리는 교통접근성이 떨어지고 해발 300미터가 넘는 그야말로 두메산골이다. 그래서 개발도 더뎠다. 집은 오두막이었고 농경지는 논 대신 경사가 급한 밭만 있는 고랭지여서 이곳에서 생산한 감자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밭 한가운데 구덩이를 파서 묻어두었다가 봄에 꺼내 팔았던 특산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2003년 아름마을 사업이 추진되기 전까지 이랬던 구병리는 지금은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모습이다. 새로지은 전원주택들이 들어서고 농경지는 경관농업으로 마을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여기에 또다른 변신은 2016년 한국천주교회에서 구병리를 멍에목 성지로 선포하면서 이뤄졌다.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 된 것.
단순한 행정마을 구병리가 천주교회의 멍에목 성지가 된 것은 로마교황청 자료에서 찾았다. 한국천주교회 1대 신부인 김대건 신부에 이어 2대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는 전국을 다니며 사목활동을 했는데 바로 멍에목에서 신도 3명에게 세례를 줬다는 기록이 나온 것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1861년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 내용을 로마 교황청에 편지로 보냈는데 그 편지에 세례를 줬다는 기록이 있고 그것이 2014년 발견돼 한국천주교회에서 성지로 선포한 된 것이다.
그리고 세례를 준 성지였던 것에 근거해서 최양업 신부의 탄생 200주년 기념일에 맞춰 소박하지만 성스러운 세례성당이 봉헌됐다.
우리마을 탐방원정대원들은 이날 성당 관계자의 안내로 멍에목 성지와 성당을 탐방하면서 설명을 듣고는 새로운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멍에목 성지와 또 세례성당 봉헌으로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과 또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져 지역 관광황성화로 이어지길 기대했다.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가 장안면 선진규 이장집에서 80여년된 우물을 보면서 주변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생활문화유산을 보고 과거를 추억하고 또 먹는 물의 변천사까지도 생각해보고 물을 아껴 사용하는 습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다.

#장안면 선진규 이장집 80여년 된 우물
장안면 개안리에는 보성 선씨 3가구의 고택이 있다. 가장 큰집인 우당고택, 그리고 복해가든으로 유명한 선병우 고가, 그리고 선병묵 고가가 그곳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볼거리인데 이곳에 오래된 우물도 있다. 수도꼭지만 틀면 부엌이든, 마당이든, 화장실이든 콸콸 나오던 것만 봐온 어린 세대들에겐 색다른 볼거리 근대 생활문화유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바위사이로 떨어져 모이는 석간수를 길어서 먹거나 우물 속으로 두룸박을 내려서 박속으로 물을 담아 퍼올려 먹거나, 펌프 물을 퍼올리는 등 사람이 힘을 가하거나 움직여야 물을 먹을 수 있었다. 이중 펌프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시골에서는 보유하고 있는 가정이 있었다. 지금은 민속촌에서나 실물을 보고 20세기 생활상이 나오는 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들이다. 우물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든유산이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건축, 도지정 문화재 자료로 등록된 선병묵 고가에는 아직 우물이 살아있다.
우리마을탐방 원정대원들을 맞은 선진규 이장은 우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집을 짓고 우물을 팠을테니까 우물 굴착 역사는 80년은 족히 넘을 것이라며 처음엔 우물 테두리를 돌로 쌓았었는데 시멘트 콘크리트가 나오면서 시멘트 콘크리트로 1차 개조한 것이라고 기억해냈다.
또 우물물을 이용해 식수는 물론 여름철 등목을 하고, 어머니는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빨래는 우물물로 빨았었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 우물 속에 수박, 참외를 넣어 차게 보관했다가 먹었던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선진규 이장은 또 과거에는 집집마다 우물이 다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우물이 없던 주변의 농가에서는 우리 우물의 물을 이용했는데 우리집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른 적이 없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했다고 덧붙였다.
선진규 이장은 그러면서 마을에 먹는 물 공급을 위한 관정이 개발되면서 자연스레 우물을 사용하지 않게 됐는데 우물 사용을 중단한 지도 30년은 넘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원정대원들은 낙엽 등 오물이 우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덮개로 덮어놓은 우물을 보면서 주변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생활문화유산을 보고 과거를 추억하고 또 먹는 물의 변천사까지도 생각해보고 물을 아껴 사용하는 습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다는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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