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탐방 원정대]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다’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다’
  • 송진선 기자
  • 승인 2024.06.13 10:29
  • 호수 7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예술 자조모임, 내북·산외지역 탐방

영동의 자계예술촌이 추진하는 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본사인 주간 보은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우리고장의 지정, 비지정 문화재와 생활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가 운영되고 있다.
우리마을 탐방원정대는 보은에 살면서도 군내 구석구석을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는 가운데 이번 사업을 통해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애향심을 키우고 문화재의 소중함과 조상의 지혜와 슬기를 배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우리동네 원정 탐방대의 호기심 가득한 첫발은 지난 2일 뗐다. 첫 방문지는 내북면과 산외면. 이상우 대장을 중심으로 한 원정대원들은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며 지역의 문화재 등 유적과 옛문화인 돌담, 그리고 양조장 현판,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하는 동자석, 그리고 폐교 등을 살폈다.
탐방지인 산외면과 내북면에는 봉계리에 국민방위군 의용경찰 전적기념탑도 있고 또 내북면에는 애국지사인 이승칠 지사 공적비와 의병장 석성국 의사의 묘소가 있어서 헌화 참배를 하기 위해 미리 참가자 숫자대로 국화를 준비해갔다.
봉계리 국민방위군 의용경찰 전적기념탑에서 먼저 헌화하며 고장을 방위하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선 국민방위군과 의용경찰의 넋을 추모했다.
이어 산외면 아시리에 있는 능성 구씨 소유의 효자각을 둘러보고 문암리 방향으로 도로변 논에 자리하고 있는 남자 동자석의 코가 뭉개진 것을 보고 과거 남존사상이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등 동자석, 장군석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원래 이 남자 동자석 옆에 키가 큰 소나무가 있어서 수호목처럼 음력 정월에 제를 지내고 짚으로 꼰 금줄을 둘렀으나 소나무가 죽어서 동자석 놓을 기단을 새로 설치하고 소나무도 새로 식재하는 등 정비했다. 여자 동자석은 산외면 치안센터 옆 구티리 진입도로 입구에 설치돼 있다.
구티리는 산외면 소재지로 작지만 행정 및 경제활동의 중심지이다. 면사무소였던 행복지원센터가 있고 또 산외초등학교, 우체국, 보건지소, 농협 및 점포는 몇 개 안되지만 상가가 형성돼 있다. 인구가 줄어들대로 줄어 든 산외면은 인구가 급감한 곳임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면에 하나밖에 없는 산외초등학교는 전교 학생수는 5명에 불과하고 과거 사람이 많었던 시절 운영됐던 술도가도 폐업, 지금은 산외양조장이란 나무현판만 걸려있다. 비가 들이치고 햇빛에 노출되면서 산외양조장이란 나무현판 곳곳이 훼손돼 얼마 지나지 않아 현판마저 사라질 것 같았다. 사진으로나마 기록해둔 것이 이번 탐방 원정대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인구감소의 징표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폐교다. 산외면 산대리에 있는 산대초등학교는 5, 6개마을의 아이들이 공부를 했던 곳이었지만, 학생수 감소로 산대분교로 격하됐다가 아예 폐교됐다. 그 많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산대분교는 잡초만 무성한 채 낡은 모습을 지탱하고 있다.
산외면에는 유서깊은 마을이 있다. 바로 산대2리 신개울 마을.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강요했던 시절 문화 류씨 집성촌인 이곳 주민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1940년 조성총독부가 창끼새명을 요구했으나 류효준, 류호석, 류호영씨 등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원로들이 개명을 거부하는 데 앞장서 문화 류씨 20가구, 풍양 조씨 1가구, 여산 송씨 1가구 등 신개울 마을주민 115명 모두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보은군은 지난 2008년 50억원을 들여 산외면 산대지구 농업·농촌테마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보은군의 문화유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미니어처 공원과 함께 창씨개명 거부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창씨개명 불응 유사기(創氏改名 不應 有事記)’가 담긴 비문(碑文) 설치 등 ‘산대 창씨개명 반대 이야기의 길’을 조성해 방문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조차 친일에 앞장섰던 시절 시골 작은 마을에서 이같은 집단적인 창씨개명 거부는 주민들에게 애국심을 갖게 했다. 사적지로 지정할 만한 가치있는 마을이란 생각이 든다.
구티리 우체국 옆, 군 보호수인 느티나무 인근에 어사 김명진의 애민선정을 기린 철비가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산이 거북이와 같다고 해서 구티리(龜峙里) 라고 했던 구티리는 일제가 한일 강제병합 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거북이 구(龜) 대신 탁주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아홉 개여서 아홉 구(九)를 쓴 구티리(九峙里)가 됐다. 구티고개는 1984년 세계은행 차관사업으로 확장 및 포장되어 일곱구비로 구비를 줄였고 다시 도로개선사업을 하면서 현재는 다섯구비만 남아 있다.
구티리에서 길탕리 주막거리로 넘어가는 작은 구티고개는 옛 모습대신 직선 도로로 정비됐다. 산외면의 구석구석을 탐방한 우리동네 원정 탐방대는 산외면에서 내북면으로 이동 내북면 봉황리에 있는 이승칠 지사의 공적비에서 이승칠 지사를 추모하고 참배했다.
고종 6년 1876년 무과에 합격, 찰방을 지냈고 고종 23년엔 사헌부 감찰에까지 올랐으나 1910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당하자 여러차례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912년 왜황 메이지[明治]가 죽자 왜인으로부터 상복(喪服) 입기를 강요당하니 “내 몸에 원수의 상복을 입음은 만 대의 수치라” 는 유서를 써놓고 내북면 봉황정(鳳凰亭) 절벽 위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후 지금의 달천 푸른 물속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참배 후 내북면 이원리로 이동, 의병장 석성국 의사의 묘전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석성국 의사는 대한제국 시절 속리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부대 참모장으로 왜병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1908년에는 적정을 탐색하기 위해 홀로 나섰다가 왜병에게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당했고 저항하다가 끝내 자결했다.
탐방대 참가한 주민들은 “지역들 다녀도 관광지 위주로 다니고 나와 관계없는 곳을 다닐 일이 없는데 대원들과 함께 지역 곳곳을 다니며 지역 역사도 배우고 문화재도 보고 또 남아있는 근대에서 새마을사업 초기 생활문화유산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참가 소감을 밝혔다.
다음 우리동네 원정 탐방대는 속리산면과 장안면 일원을 탐방할 예정이다.
 

내북면 이원리에 있는 의병장 석성국 의사 묘소를 참배하고 전 향토문화연구회장인 최규인씨가 석성국 의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탐방원정대원들이 듣고 있다.
탐방 원정대원들이 내북면 이원리에 있는 의병장 석성국 의사의 묘전에 헌화하고 참배하는 모습이다
내북면 봉황리에 있는 이승칠 애국지사의 공적비를 둘러본 탐방원정대원들이 헌화하고 참배했다.
산외면 산대2리는 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거부한 지정되지 않은 사적지이다. 이곳에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관광상품인 미니어처 공원을 조성해놓았는데 사진은 탐방원정대원들이 보은군의 대표적인 중요문화재 중의 한 곳인 우당고택의 미니어처를 보고 있는 모습이다.  
산외면 산대2리 창씨개명을 거부한 스토리를 담은 비석이다. 미니어처 공원에 설치돼 있다.
한때 학생수가 넘치고 넘쳐 동네 몇개 부락을 학구로 한 학교들이 들어섰었다. 지금은 폐교된 구 산대분교도 5개마을을 학구로 해서 설립됐었다. 하지만 학생수가 감소되면서 폐교된 지 오래돼 잡초만 무성한 채 방치돼 있다. 구 산대분교를 보고 탐방원정대원들은 "인걸은 간데없고..."를 읊으며 학생수 감소를 다같이 걱정했다. 
폐교된 구 산대분교의 모습이다. 한때 수련시설로도 임대됐었으나 재계약이 안된 이후 방치돼 있는 모습이다.
산외면 구티리 마을을 수호하는 동자석의 모습이다.
보은군이 지정하는 군 보호수다. 한 때 그늘이 넓어서 산외면 소재지인 구티리 주민들을 다 품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강풍에 가지가 부러져 수세가 왕성하고 위풍당당했던 과거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산외면 구티리 소재지. 옛날 구티리 소재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골목이다. 이곳이 산외면 구티리의 중심골목이다. 이 골목에 양조장도 있고 이발소도 있고 다방도 있고 연쇄점도 있고 왕순대 식당도 있고 백반집도 있었다. 
구티리 이발소에서 매어놓은 개가 느린 하품을 하며 사람없는 골목을 저 혼자 지키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