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부부의 백 년 인생 이야기
어느 노부부의 백 년 인생 이야기
  • 보은사람들
  • 승인 2024.05.23 10:00
  • 호수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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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윤이
산외면 대원리

우리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은 102세 된 안 할아버지다. 부인인 홍 할머니는 올해 100세가 되었다. 15년 전, 우리 가족이 대원리 마을에 처음 이사 왔을 때 할아버지는 87세였다. 그때 할아버지는 하루 두 번 오전과 오후에 마을에서 가장 가파른 산책길을 오르내리셨다. 해가 갈수록 올라가는 길이 조금씩 짧아지더니 지금은 날이 좋으면 집 앞에서 어르신 보행기에 의지해 100-200미터 정도 왔다갔다 할 뿐이다, 그나마 날이 흐리거나 춥거나, 몸이 안 좋을 때는 나오지 못할 때가 많다. 기력이 약해졌지만 시력도 안 좋아져 앞을 잘 보지 못하시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길잡이 역할을 하셨는데 할머니도 골반 뼈가 안 좋아 산책하기 어렵다. 할머니는 일찍이 허리가 굽어서 지팡이에 의지해 걸었는데 넘어져 다치신 후론 보행기를 잡고 다니기도 힘들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지금은 모든 움직임이 조심스럽다. 
할머니는 열일곱 살에 이 마을로 시집오셔서 시할머니와 줄줄이 시동생들 건사해 가며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이듬해 할아버지는 일본군에 징집되어서 할머니가 거의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일본군들이 곡식을 수탈해 가서 먹을 게 없어 칡뿌리로 만든 개떡(요즘 우리가 먹는 쑥개떡과는 다른 것 같다. 쌀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떡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이나 풀죽을 쒀서 먹기 일쑤였다. 
언제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쉽게 아이를 가지지 못했는데 어르신들 눈치깨나 보신 것 같다. 얼굴이 길어서 아이를 못 낳는다, 남자 같아서 아이를 못 낳는 다며 눈칫밥을 드신 것 같다. 할머니한테는 상처가 되었을 말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기억이 서로 달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결혼 후 4년인가, 7년 후에 첫딸을 낳았는데 1남 3녀를 두었으니 그들의 말은 조바심이 난 근거 없는 추측이었을 터이다.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든 일제 강점기를 지나 겨우 해방이 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6·25전쟁이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다시 국군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금은 마을 가운데에 사시지만 당시 마을 가장 높은 쪽에 위치한 높은점에 사셨던 할머니는 갑자기 들이닥친 북한군의 밥을 해주시기도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없이 어린 아기를 업고 없는 곡식에 몇 끼를 차려내야 했으니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었을까? 그때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으랴. 지금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는 전쟁 중 손에 부상을 당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느 접전지에서 다치셨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살아오신 것만으로도 기쁘셨을 것이다. 아직도 현관문 앞에는 ‘국가 유공자의 집’ 문패가 달려 있다. 그 후 할아버지는 마을 구장(현재의 이장)으로 오랫동안 일하셨다고 한다. 옛날 어르신들이 대부분 그러셨듯이 바깥 일을 하시느라 집안일은 할머니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허리가 굽어진 게 아닌가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살아온 세월이 83년이다. 그 수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내셨을까? 어떻게 견디고 버텨오셨을까? 
할머니는 지금도 식사를 하실 때 한 숟갈이라도 더 드시라고 할아버지 숟가락에 밥을 얹어 드리고, 할아버지가 고등어를 드실 때 가시가 들어갈까 봐 가시를 발라주신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젓갈 반찬은 잘 드시지도 않는다.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 방식일 터이다. 가끔 할아버지네 가면 할아버지께 묻는다. “할아버지, 지금껏 할머니한테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부질없는 질문일지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할머니한테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비해 시력은 좋지만 귀는 더 어두워서 대화가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행복마을 선진지 견학으로 부여 송정그림책마을에 다녀왔다. 30여 가구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2년 7개월 여 준비해서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의 인생이 담긴 26권의 그림책을 완성하였다. 그림 그리기도 7개월에 걸쳐 스스로 그리셨다고 한다.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책을 읽어주고 인형극도 보여주신다. 
견학을 하고 나서 우리 마을 어르신들도 꼭 그림책이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인생이 담긴 글이나 시를 써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늘은 100년의 인생을 사신 노부부의 인생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100년의 시간을 이 짧은 지면에 다 풀어낼 수 없고, 100년의 시간이 다 행복으로 채우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노부부가 100년의 시간을 함께 살아내신 것만으로도 박수 받아 마땅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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