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고 따뜻한 햇살이 계당을 비추면 어디선가 선비들이 나타나 탁족놀이를 하며 시를 읊을 것 같은 황토마을
밤낮의 길이가 같다는 동지이다. 겨울이 깊어가서 그런지 겨울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진다. 이번주는 질 좋은 황토가 많아 황토 말이라 부르던 선곡 2리와 사각골로 불리던 3리를 찾았다.
선곡리는 한때 150가구가 넘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시골 사정이 그러듯 이곳도 젊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선곡리는 금화사(金華祠)가 있었던 마을로 예부터 학문과 예절의 마을이다. 본래 금화사는 현재의 선곡1리에 있었지만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 철폐되었다. 현 위치에 재건하였다.
향토역사를 좋아하는 필자는 역사적 유적 유물이 전해지는 마을을 방문하고자 하는 날은 소풍 가기 전날 잠 못 이루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든다. 지난밤 선곡 2,3리를 방문한다고 생각하니 밤잠을 설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왜냐하면 선곡리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많은 마을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은 계당(溪堂) 아래 계곡에 쓰여 있는 각석문(刻石文)을 확인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다 보니 어느덧 상장들이 나온다.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문은 굳게 잠겨있고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여전히 차갑게 다가오지만 맑은 날씨 탓인지 그리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마을 사진 몇 장 찍고 필자의 발걸음은 질구실 방향으로 옮겼다. 황토 말에서 질구실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산이 방구배기이다. 이산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진다고 해서 오며 가며 소원을 빌기도 했다고 한다. 필자도 소원을 빌어야겠다는 생각에 큰 바위를 찾아가는데 길옆 커다란 바위 하나가 나온다. 마치 고인돌처럼 생긴 바위는 옛사람들이 소원을 빌기에 충분한 바위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조상님들은 고인돌을 칠성바위로 불렀고 그곳에는 치성을 드리는 신성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 뒤 길모퉁이에 있는 바위는 치성을 드리는 바위였을 것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방구배기의 바위돌은 지금도 지나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바위로 고인들의 형태를 띄고 있다.
방구배기를 지나 선곡3리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어르신 한 분이 점심을 준비하고 계신다. 인사를 드리고 선곡리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니 올해 84세 되셨다고 하시면서 “우리 마을은 사각 골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20가구 남짓 살고 있답니다. 어른들은 다들 돌아가셨어요. 그러다 보니 옛날이야기가 전해지지 않고 있답니다. 우리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계당 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마을 뒤에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어르신이 알려 주신대로 회관을 나와 계당으로 향했다. 동지 눈이 내려 산길 음지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다. 동지에 눈이 내리면 그해 풍년이 든다는데 아마도 2024 甲辰年은 풍년이 올 것 같다. 좁고 꾸불꾸불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산 중턱 아담한 한옥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주위에 있는 비석문을 살펴보는데 사현신도비(四賢神道碑), 금화사복원중수기(金華祠復元重修記), 전 국회부의장존현공적비(前 國會副議長尊賢功績碑),등 많은 비석들이 눈에 들어 온다.
#뒷골 계곡은 조선 중기 당대 명사들이 학문을 논하기 위해 계당 선생을 찾아오는 선비들로 북적이던 골짜기로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합격률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수험생들이 찾아와 공부하던 계당 강당이 있는 곳
금화사 옆 작은 계곡에 계당(溪堂)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계당 최흥림 선생(溪堂 崔興霖, 1506~1581)이 은거 하시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었다. 계당 최흥림 선생은 대곡 성운(大谷成雲)선생의 문인으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몰두한 분이다. 15년 전 필자가 계당을 찾아왔을 때 계곡 아래 각석문(刻石文)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여 계곡 아래를 찾아보니 희미한 글씨가 보이긴 하지만. 너무 흐려 어떤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언제 오셨는지 노인 한 분이 무엇을 찾는냐고 물어 보신다. 이곳에 대해서 알고 싶어 찾아왔다고 하니 계당은 1980년대 큰 물난리가 나기 이전만 해도 공부를 하는 수험생들이 종종 찾아왔던 강당이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이곳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요. 계당 선생이 계실 때부터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은 합격률이 높았다는 설이 있다 보니 전국에서 많이 찾아왔던 것 같아요. 지금은 찾아오는 수험생들이 없나요? 하고 필자가 여쭈어보니 “네 옛 시설이다 보니 요즘은 없답니다.” “혹시 이곳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하고 필자가 재차 물어 보니 “이 계곡은 계당 선생이 공부하다 더위를 식히는 목욕소가 있는데 여름에 이곳에서 더위를 식히기가 좋답니다. 그리고 저 아래 바위를 보면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큰 비석이 있었는데, 1980년대 홍수에 떠내려갔답니다. 예부터 이곳은 선비들이 고시 공부를 하던 곳이랍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고 없지만 선곡뿐만 아니라 보은은 공부하기 좋은 곳이 많이 있는 지역이지요. 그런 것을 살려 보은의 정신이 복원되면 좋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습니다.”하시면서 마을로 내려가신다.
계당 최흥림 선생과 학문을 논했던 대곡 성운 선생은 1545년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보은 속리에 은거했던 분으로 시문에 능하였으며, 남인계의 영수이고 우계 학파를 이끌었던 우계 성혼과는 6촌간이다. 동주 성제원은 보은 현감으로 충암 김정 선생을 기리기 위해 삼년산성 내에 독향원을 세워 보은의 선비 정신을 확립하게 했던 분이고, 남명 조식 선생은 학문이란 일반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고 삶을 영위하는데 실질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 라며 학문의 본질을 말씀하신 분으로 김효원, 곽재우 등 많은 문하생들과 남명 학파를 이룬 영남 사림의 대학자이다. 이런 대학자들과 교류했던 계당 선생의 발자취가 보은에도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데, 금적산 봉수대 자리에서 흰 구름 한줄기가 승천하는 용처럼 힘차게 올라간다.
양화용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