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지역 3·1만세운동의 전개와 의의
100년 전,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대한제국의 민중들이 민족의 자존과 자주독립의지를 모아 일본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세계에 고발했다.
3.1운동을 이끌어낸 모태이고 뿌리는 새 세상을 꿈꾸고 만들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 그 이상이 1919년 3.1운동으로 이어졌고 3.1운동의 숭고한 민족정신은 4·19 혁명, 부마 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촛불 시민혁명으로 계승되었다. 이 땅의 자유와 평화, 민주, 인권을 주창한 운동으로 승화된 것이다.
지난 4월 8일 충청북도가 주최하고 보은문화원·충북학연구소가 주관하고 보은군새마을회가 후원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문화원 시청각실에서 개최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대길 박사의 '보은지역 3.1만세운동의 전개와 의의'에 대한 주제발표에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 구금회 보은중학교 교사, 박진수 보은문화원 이사, 최규인 보은향토사연구회원이 토론자로 참여해 보은지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짚었다.
좌장을 맡았던 충북시민재단 강태재 이사장은 보은군에 3.1운동을 기념할만한 시설이 하나도 없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올해가 가기 전에 보은에서 있었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3.1만세운동을 알릴 기념물을 충혼탑 주변이나 좋은 장소를 물색해 설치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주제발표를 한 김대길 박사는 3.1만세운동이 전개된 지 100년이 되는 즈음에 정부차원에서 기념행사가 진행됐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지금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세운동 참여자와 목격자 등의 증언채록과 관련 자료의 수집, 정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졌다면 하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더불어 독립만세운동의 의의와 이에 참여했던 선열들의 활동을 깊이 되새길 것을 강조했다.
김대길 박사 "읍내 장터가 아닌 산외면서 3.1만세운동 시작"
김대길 박사는 충북에서 3월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려던 독립투사들이 일본경찰에 잡혀 투옥되고 독립선언서를 압수당해 만세운동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후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에 참여한 인사들이 돌아와 비밀리에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고 말했다.
그럼 보은에서는 어떻게 만세운동이 전개됐을까?
3월 중순 이래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독립선언문이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구체적으로 전달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김대길 박사는 보은군에서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산외면이라고 밝혔다.
4월 2일 산외면 어온리와 이식리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시도됐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제지당했고 이튿날인 4월 3일 이식리에서 10여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만세운동 소식이 군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는 등 조용하던 보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헌병을 파견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을 정도다.
4월 7일 회남면과 회북면 일대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실행되려다 제지당해 무산됐다. 그러나 4월 8일 내북면 서지리와 산성리 일대에서는 구열조·윤정훈· 이용기 선생 주도하에 관모산에서, 그리고 무명산, 일명 갓빈데산, 성산 등에서 조선 독립만세시위가 펼쳐졌다.
이어 4월 11일 탄부면과 산외면에서 만세운동이 계속됐는데 구티리(구치리)에서는 주민 100여명이 집결해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날 탄부면에서의 만세운동은 구인리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 만세를 고창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탄부면의 만세운동은 한 곳에 집결해 벌인 것이 아니라 길상리와 구인리로 분산해 전개됐다.
이어 4월 12일에는 수한면 묘서리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됐는데 오후 8시경 농암산에서 청년 최용문, 안만순, 송덕빈 주도하에 주민 60여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수한면에서는 13일에도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는데 이 같은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다. 묘서리에 거주하는 권양하씨가 쓴 일기에 기록돼 있는 것인데 13일 밤에도 동네 주민들이 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자 원근에서 호응하면서 만세를 불렀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김대길 박사는 보은지역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기록돼 있는 시위미연방지 기록 22건이나 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4월 2일 산외 어온·이식 △4월 4일 마로 세중 △4월 5일 회북 중앙 △4월 7일 회남 금곡·회북 애곡·회북 부수·회남 조곡 △4월 8일 보은 학촌·산외 봉계·내북 서교·내북 산성 △4월 10일 수한 교암·회북 용곡·회북 용촌·회남 매산·회남 산수·회남 법수·보은 길상 △4월 11일 탄부 구인 △4월 12일 수한 묘서 △4월 13일 삼승 선곡리는 만세운동이 사전 저지당한 곳이다.
김대길 박사는 시위미연방지 건이 특히 많은 것은 준비단계에서 탐지돼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것인지, 시위운동이 전개됐지만 곧바로 해산당하거나 진압돼 무산된 것으로 기록됐는지에 대한 재검토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대길 박사는 또 다른 지역이 읍내나 시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인 것과 달리 보은은 4월 2일부터 13일까지 10일간 전개된 3.1만세운동이 장터가 아닌 동네 산에 올라 전개한 것이 특이하다며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지 않은 이유의 분석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론자의 주장
구금회 "동학농민전쟁 후 일경의 감시때문"
보은중학교 구금회 교사는 도내 다른 시군에서 여러차례 만세운동이 전개될 경우 한 두 번은 읍이나 시장터에서 전개된 것과 달리 보은군에서 읍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공감했다.
구금회 교사는 나름 그 이유에 대해 보은은 동학농민전쟁의 최후 항쟁지이고 다른 어느 지역보다 항쟁의 역사적 정통성을 품고 있고 치열한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지역으로 일경의 감시체제가 작동됐기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김양식 "3.1운동 사적지조성 등 친생활적 공간 필요"
충북연구원 김양식 수석연구위원은 만세운동이 미연방지사위사건이 22건이나 될 정도 지역사회에 3.1운동 참여열기가 대단했다고 평가하면서 3.1운동이 일제 저항을 넘어 일반 민중들의 의지와 염원, 정신을 폭넓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던 보은지역은 3.1운동이 갖는 특별한 장소적 의미가 있다며 3.1운동의 가치를 3.1운동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이후 어떠한 역사변동의 동력이 됐는지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헌중심의 3.1운동의 연구를 증언 등 일기자료나 구술 채록 등 구전자료로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보은지역 3.1운동 유적지가 충북(64곳)의 11%인 7곳에 불과하고 유공자는 충북 205명의 5.4%에 불과하다며 적극적인 유공자 발굴을 주문했다.
보은의 3.1운동 사적지가 장터 1, 산 2, 기타 4곳인데 생가 등을 보존하지 않고 있고, 단 한 곳의 기념시설이 없다며 동학농민혁명 기념시설과 연계해 평등, 평화, 민주 등의 근대가치를 담아낸 친생활적 공간 조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진수 "동학 연장선으로 연구해야 할 것"
보은문화원 박진수 이사는 보은지역의 3.1만세운동은 1894년 12월 동학농민혁명 북실전투로 인해 보은은 일본의 감시대상 지역이었으며 속리산을 중심으로 의병이 봉기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일반 민중에 대한 일본의 감시가 다른 지역보다 더욱 심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분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며 독립유공자로 드러난 인물이 적은 것은 동학과도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3.1만세운동이 일본인들이 만든 판결문이나 매일신보에만 의존하고 매일신보에 시위 미연에 방지, 무사히 해산은 일본측 입장을 적은 것이라며 3.1운동에 국한하지 않고 동학 연장선으로 연구할 것을 주문했다.
최규인 "독립유공자 출신 마을자랑비 3.1기록 전무"
보은향토사연구회 최규인 전 회장은 보은군지에 3.1운동 의사로 기록된 유공자의 현지의 기록이 남아있는지 현장을 답사했지만 거의 기록이 없었다 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3.1운동 최초의 발상지인 산외면 어온리에 100년전 흔적이 있을까 기대를 했으나 어온리, 가고리에는 마을자랑비 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때 군면통합을 하면서 배 주(注)를 배 이(梨)자를 써서 이식리로 개명한 이식리에도 3.1운동 기록은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봉황리는 마을자랑비에 이승칠 의사의 기록이 있었으나 이승칠 의사가 자결한 청벽아래 세워진 유적비에는 한자를 잘못 쓰는 등 선열들의 우국충정의 마음을 후세에 사는 우리들이 가벼이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해 부끄럽고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자랑스러운 선조를 배출한 예안 이씨들이 많이 사는 구인리는 훌륭한 정신을 기리는 기록물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전혀 찾을 수 없었고 묘서리 마을자랑비에도 최용문 송덕빈 안만순 독립투사 이름만 있을 뿐 의로운 행적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이쉬워했다.
최 전 회장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이 아니고는 보은에서 이런 학술대회가 열리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년 101주년에는 충북학연구소나 충북도의 지원을 받지 않고 보은군민의 뜻을 모아 3.1운동에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아름다운 선양사업을 해나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