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이든, 마을 어귀에는 항상 구멍가게가 있었다.
많지 않은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구멍가게의 기능은 아주 크다. 우선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에서부터 동네 노인들이 즐겨 드시는 막걸리까지 준비돼 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도회지의 그 것처럼 번드르르한 멋은 없지만 시골서 자란 사람이면 쉽게 느낄 수 있는 아주 편한 맛이 있는, 그런 가게가 바로 마을 어귀 구멍가게다.
뙤약볕 아래 밭일 하러 나오면서 지갑까지 챙길 리는 만무, 외상도 척척 이다.
굳이 외상이라고 말하지 않고 가시는 분도 심심 찬케 보인다. 그냥 가도 대충 다음에 준다는 걸로 아는 믿음이 있어서 일까?
여하튼 아주 편한 가게가 바로 구멍가게다.
더 편한 건 뭘 반드시 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편한 공간이니 마을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건 당연한 일.
보은읍 죽전리 어사촌 식당 앞에 위치한 주부슈퍼도 이런 구멍가게다.
아니,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구멍가게보다는 규모면에서나 시설 면에서나 큰 마트에 가깝지만 오랫동안 지역 주민과 함께 해 온 주부슈퍼는 어느 시골의 구멍가게보다 정이 넘친다.
◆슈퍼 이야기
강명화(64)씨가 슈퍼를 운영하며 처음 주민과 함께 한 것은 30년 전 부터다.
강씨가 슈퍼를 운영한 것이 30년 전이지만 그 전부터 주부슈퍼는 '연화집'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들과 함께 했다.
"아버지, 어머님이 운영을 하셨지요. 식당과 슈퍼를 한다고 했더니 보건소에서 지어준 이름이 바로 연화집입니다. 제가 슈퍼를 운영하기 전, 아버님과 어머님이 운영하셨지만 그때는 지금과 달라 보은고등학교 주변에서 자취하는 학생들이 꽤 많아 장사가 잘 됐어요."
오랫동안 주민들과 함께 해서인지 지금도 30년 전의 강씨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그때를 잊지 못해 슈퍼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손님과 주인의 개념보다는 가족의 개념을, 경제논리보다는 정을 중요시하는 강씨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옛날의 친근한 슈퍼의 이미지는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지역에 대형마트가 생겨나면서 매상은 크게 줄었고, 경제가 침체되면서 가장 먼저 마을 앞 슈퍼를 찾지 않게 된 것이다.
"대형마트에서 일주일 먹을 것을 한꺼번에 사다 놓고, 동네 슈퍼는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 사는 곳으로 바뀌었어요. 어째 옛날 IMF때 보다 경기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 그때부터 경기가 침체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예 바닥인 것 같아요."
이처럼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주부슈퍼는 아이들에게 친근하고, 주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던 '우리슈퍼'의 이미지는 그대로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돈이 없으면 그냥 가져가도 되는 믿음과 정이 있다. 또한 어른이 된 아이들이 다시 '슈퍼'를 찾아 옛 추억을 되새길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우리 슈퍼'다.
◆기나긴 방황
지금은 부인 박은실(57)씨와 함께 '주부슈퍼'를 운영하고 있지만, 슈퍼를 운영하기 전 강씨는 긴 세월 동안 세상과 힘든 싸움을 펼쳐야 했다.
삼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강씨는 형님이 계신 부산으로 가 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월남전이 터졌다.
"격전이 벌어지던 그 전쟁터에서, 생사를 알지 못하는 힘든 시간을 보냈죠. 지금도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을 가지고 사는 이유도 그 전쟁터에서의 기억 때문일 꺼 에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21살의 어린 나이에 제대를 했지만,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세상에 나왔으니, 이제부터 밥벌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전쟁터에서 보낸 2년이란 세월이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월남전의 상처를 떨쳐내는데 10년은 걸린 것 같아요. 술도 많이 먹었고, 개똥철학도 배워본다고 참 많이도 돌아다녔죠."
21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에 나온 강씨는 10년의 세월을 흘려보낸 후 서른이 되어서야 부모님이 하던 슈퍼를 이어받았다.
◆새로운 도전
경제성장에 맞물려 슈퍼도 크게 번창했지만, 강씨는 결코 슈퍼 운영에만 안주한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6년의 세월을 민정당 유급 사부장을 지냈고, 그것이 인연이 돼서 보은군 하천감시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런 그에게 5년 전 새로운 목표가 세워졌다. 바로 요양보호사다.
"요양보호사가 여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연령제한도 없었고, 월남전에 참전했던 동료 전우들과 그 가족들을 돌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맘 크게 먹고 도전했죠."
그렇게 2년.
우리고장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남자로서는 유일하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 낸 강씨는 동료 전우들과 유족 15가정을 돌봤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금강유역환경청 환경지킴이.
바로 강명화씨의 새로운 활동분야다.
◆깨끗한 환경의 미래의 경쟁력
오랫동안 그 곳에 살아온 이들은 자신을 키워준 자연에 애정을 느낀다. 그 자연에는 산과 강, 땅과 하늘, 그리고 그 곳에 서식하는 모든 생명체가 포함된다. 자신의 생애뿐 아니라 몇 대가 거주해 온 마을은 두말 할 것이 없다.
우리고장 주민들이 보청천에 대한 애정은 남다를 것이다. 차가운 시냇물과 정겹게 우는 개구리 소리, 계곡 마당발 가재, 흑진주처럼 곳곳에 박혀있는 올갱이들과, 그 올갱이를 먹고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이것이 오래 전 보청천의 모습이었다.
피서객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면서 쓰레기로 계곡은 오염됐고 신음했다. 동면한 개구리들은 보양식으로 싸그리 잡혀갔고, 맑은물 지표생물이라는 가재도 사라져 갔다.
"금강환경지킴이는 우리강은 우리가 지키자는 취지로 환경에 관심과 열정을 가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우리강 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고장에도 4명의 주민들이 참여해 수질오염행위 감시와 계도, 환경인식제고를 위한 주민교육 및 홍보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장안면에서부터 마로면, 탄부면까지 보청천을 중심으로 감시활동을 하는 강씨지만 그는 단순히 예전처럼 건강한 생명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서만 의미를 찾지는 않았다.
환경지킴이 활동을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됐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두꺼비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4대강을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친 사람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환경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게 됐죠. 예전같으면 소득도 없는 일에 왜 저렇게 매달리고, 애쓰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요. 환경을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건강을 생각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우리 아이들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친환경무상급식과 같은 정책에도 관심을 갖게 되더라구요."
새로운 변화는 아니라고 했다. 한쪽으로 치우쳐져있던 생각에 균형감각을 갖게 됐다는 것이 강명화씨의 표현이다.
보청천에서 발견한 새알과 종다리, 두꺼비 알이 반가운 것처럼,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강씨는 똑같은 반가움을 느낀다.
"담배를 끊는 것 만큼, 생각을 열기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환경을 생각하고,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도 있는 부분이죠. 균형적인 생각과 사고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요?"
동네 슈퍼 아저씨로서, 그리고 우리고장의 환경을 지키는 지킴이로서 강명화씨의 활동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