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경희식당
①경희식당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0.01.28 10:01
  • 호수 3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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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깔스런 한정식'일품'

경기침체 및 구조조정 등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거나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딱히 떠오르는 창업 아이템이 없을 때 흔히들 식당이나 차리겠다고 한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 때문인지, 혹은 밥은 먹었냐는 것이 인사말이 될 정도로 못 먹고 살아온 탓인지 길거리 마다 식당이 넘쳐난다.
음식점도 반짝 유행을 타 조개구이집이 잘된다 싶으면 골목골목마다 조개를 굽고 불닭이 유행하면 전국에 불닭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대부분 간판을 내린다.
따라서 아무리 먹는 것이 기본이라 쉽게 식당업에 뛰어들지만 당대를 지나 2대, 3대까지 이어가는 식당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대를 이어 식당업을 가업으로 이어가는 업소가 있다면 그들은 가장 자신 있는 메뉴한가지로 승부를 건 경영철학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업으로 대물림을 하는 식당의 경우 세월의 풍상을 이겨낸 비결은 무엇일까.
앞으로 본보는 대물림으로 식당업을 하는 음식점을 '맛집기행'이란 이름으로 맛을 탐하고 지역의 명물로 사랑받고 관광명소가 될 수 있도록 매달 한 곳씩 소개한다.          (편집자 주)

 

 

▲ 경희식당

◆영월군수 따님이 식당 열다
경희식당은 1대 남경희 할머니의 뒤를 이어 국내 굴지의 은행 지점장을 지낸 2대인 큰 아들(2006년 작고)이 1988년부터 어머니와 함께 운영하다 지금은 할머니의 손자인 3대 이두영(56)씨가 1995년부터 가업인 경희식당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할머니의 손맛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익힌 손자 이두영 사장은 남경희 할머니표 한정식을 한 층 업그레이드 해 이두영식 한정식 상차림을 내놓았다.

강원도 영월군수의 딸이었던 남경희 할머니가 식당을 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충남 논산 양반집으로 시집을 가 집안에서 바느질을 하고 자녀교육을 하는 등 안채살림만 했던 남경희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및 6·25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시아버지와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 시집식구들과 자녀를 길러야 했기 때문.

땅은 있었지만 남자없이 농사를 짓기가 힘들어 남경희 할머니는 시누이와 함께 대전, 지금의 선화동에 식당을 차려 반가 식당을 선보였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남경희 할머니가 내놓은 양반가문의 밥상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식당을 찾았다.
게다가 결혼을 앞둔 여성들이 요리학원을 다니며 조리법을 배우는 것 처럼 옛날에는 고관대작의 집으로 시집을 간 여자들이 궁중 나인(상궁)들로부터 궁중음식 조리법을 배웠는데 양반집으로 시집을 간 남경희 할머니의 시누이가 배운 궁중요리도 경희식당의 상차림에 큰 도움이 됐다.

작은 규모의 선화동에서 출발한 경희식당은 규모를 키워 지금의 유성 군인 휴양소 자리로 옮겨 영업을 했는데 유성온천이 개발돼 전국에서 관광차량으로 손님을 실어나르던 시절이어서 큰 재미를 보았다. 그러다 할머니는 70년대 전국적인 관광명소였던 속리산으로 이주를 결심, 사내리 법주사 사하촌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때가 1974년. 연간 관광객이 200여만명일 정도로 속리산은 신혼여행, 수학여행의 필수코스로 각광받았던 때였다.

 

◆1974년 속리산에 터 잡아
숙박업도 병행했던 경희식당에는 차편이 마땅치 않았던 당시 버스가 끊기면 잠을 자는 관광객이 많았다.
밥도 팔고 잠 손님도 받았기 때문에 장사가 잘됐지만 문제는 잠을 자는 손님들 때문에 방이 없어 아침밥 손님을 놓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할머니는 할 수 없이 1980년대 초 숙박업을 포기하고 밥장사에 전념했다. 40여 가지에 달하는 할머니의 맛깔스런 한정식 밥상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떡 벌어지게 차려냈다.

임금님 밥상인 12첩 반상의 수라상은 아니더라도 사대부 집안 최고 밥상인 9첩 반상 또는 7첩 반
상 정도는 됐다.  9첩 반상이 밥, 국, 김치 3, 장류 3, 찌개 2, 찜 1, 전골 1외에 나물 생채1, 구이, 조림, 전, 마른반찬, 정과, 젓갈, 회 또는 편육 등 아홉 가지 찬품을 내는 반상인데 경희식당은 첩수에 들어가지 않는 전골이나 찌개 등에서 가짓수가 차이가 나지만 첩수에 들어가는 일반 반찬은 오히려 9첩 반상의 가짓수보다도 많다. 오히려 임금님이 아침 식사 전에 먹었다는 유동식으로 경희식당에는 흑임자죽(검은 깨죽)이 나오니 수라상과 9첩 반상을 아우른다고 할 수 있는 상차림이다.

이런 상차림이니 서민들은 쉽게 드나들지 못할 정도의 가격이었다. 대부분 손님 접대가 많았고 또 식당 손님의 대부분이 외지인일 정도로 지역보다는 외지에 더 소문이 나있었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 까지만 해도 경희식당은 거의 매일 외부의 귀빈들이 납시는(?)우리지역 대표음식점이었다. 행정관서에서도 상부기관의 고위직들이 방문하면 경희식당에서 의례 대접을 했다. 지금도 지역주민 보다는 외지인들이 찾는 곳이다.

 

 

▲ 40여가지 반찬으로한 상떡 벌이지게 차려내놓는 경희식당의 한정식이다. 1대 할머니대부터 3대까지 한가지 밥상이다.

◆전직 대통령에게도 밥상 진상
이렇게 고관대작들이 드나들던 고급 식당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경희식당의 밥 손님은 외부의 고관대작들이다.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경희식당 남경희 할머니의 상차림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하면서 대전 선화동 시절의 경희식당에서 밥상을 받았고 박정희 대통령은 1975, 6년경 육영수 여사가 법주사 동암에 머무를 때 속리산을 방문했다가 직접 경희식당에서 할머니의 밥을 먹었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도 재임 초기 보은을 방문했을 때 경희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노태우·김영삼 대통령도 먹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청남대에 머무를 때 경희식당 밥을 사가지고 가서 먹었고 노무현 대통령 때는 청와대로 음식을 가져가 경희식당 밥맛을 보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 중 경희식당 남경희 할머니의 밥맛을 보지 않은 대통령은 윤보선 전 대통령과 최규하 전 대통령 뿐이고 재임 중인 이명박 대통령인데 이명박 대통령은 아직 임기가 남아있으니 재임 중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경희식당은 우리지역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에게 음식을 진상한 업소로 이름을 얻었다.

 

 

▲ 화학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재료로 조미를 해서 내놓아 담백함을 살리고 자극적인 맛을 없앤 나물 무침들이다.

◆화학조미료 대신 자연재료로 조미
경희식당이 이렇게 시선을 끄는 것 외에 가업을 이은 후계들의 경력 또한 관심을 끄는 것 중의 하나다.
2대인 은행지점장 출신인 남경희 할머니의 장남에 이어 3대인 현 이두영 사장은 미국의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재원으로 미국 영주권까지 포기하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이두영 사장은 "현재 1남1녀 자녀가 이제 대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나이여서 아직 가업을 잇겠다고 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자신처럼 자기일 하다 할머니의 유업을 이을 것"이라며 "경희식당이 중부권 한정식의 명문 대가로 명맥이 이어지도록 노력하고 가업이 중단되지 않고 일본처럼 누대에 걸쳐 승계가 되도록 할 계획이다"고 말할 정도로 경희식당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두영 사장은 현재 경희식당을 운영하면서 고향인 논산에서 직접 무공해로 고사리와 취나물을 재배하고 다래순, 두릅나무 10만주를 가꿔 식당 반찬용 식자재로 쓰고 있다. 또 곶감도 제조해 후식으로 내놓고 있는 냉동 홍시가 일품이다.

"할머니가 늘 강조한 비싸더라도 좋은 재료를 써야 하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가장 기본이고 당연한 이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이두영 사장은 자신이 식당을 경영하면서 나름대로 반찬의 질 등을 업그레이드 했다고 말했다.

짜고 맵지 않고 담백하게 조리했던 할머니의 기본은 그대로 승계하되 나물을 무치는데도 화학 조미료 대신 표고버섯 가루, 다시마 가루, 멸치가루, 건새우 가루 등을 조미해 나물을 무치거나 된장찌개 등을 끓여내 자연의 맛을 살려낸다.

또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 된장공장에 맞춤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장을 쑤고 김치도 직접 담그고 고추장도 담근다. 대량 제조된 공장의 맛이 아니라 경희식당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음식의 기본을 직접 만들기 때문에 적어도 이두영 사장과 식당에서 일하는 식구들은 "우리집 같은 반찬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반 이상은 준비를 해야 개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음식은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다고 늘 가르쳐온 남경희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가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의 맛 전수자는 이두영 사장의 아내이지만,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할머니와 함께 한 5, 6년간 눈으로 익히고 입으로 체험해 인이 막힌 이두영 사장과 7명의 종업원이 짧게는 20년, 길게는 34, 5년을 경희식당 아니 남경희 할머니와 고락을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이중 김순예(73, 속리산면 사내리)씨는 30년이 넘었다.

이두영 사장과 종업원들은 "옛날 보다 못하다고 하는 손님도 있고 옛날보다 더 맛있다고 하는 손님도 있는데 최상의 식재료를 사용해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고 새로운 반찬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7일 속리산 문장대를 등반하기 전 경희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은 강태남(57, 천안)씨가 "경희식당을 세 번 왔는데 변함이 없었지만 오늘 먹은 게 가장 맛있었고 또 사장님이 일일이 반찬에 대해 설명을 해줌으로써 평소 먹고 싶었던 것을 알게 돼 먹어보게 되더라"며 맛도 있고 좋았다고 말하자 이두영 사장과 종업원들이 크게 고마워했다.

속리산 경기가 과거 할머니가 식당을 했던 시절보다 크게 못 미쳐 이두영 사장은 고향인 논산 농장을 체험농장으로 운영하고, 집에서도 산채비빔밥을 맛볼 수 있게 고사리, 취나물, 뽕잎나물, 아주까리 나물, 산 두릅 등을 산나물 세트로 포장해 판매를 하고 있다.

가업인 경희식당의 전통을 대물림하기 위해 그가 찾은 수입원의 다양화 방법이다.

우리지역 최초 대통령 진상음식점 경희식당이 우리지역의 명소를 넘어 전국적인 명소, 나아가 한식의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시대에 맞춰 외국 손님들에게 사랑받는 한정식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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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사람들 2012-06-20 09:24:27
그런 추억이 깃든 식당이군요. 지금도 경희식당은 여전히 한정식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완하 2012-06-19 17:47:13
장모님이 살아 계실 때, 장모님의 동서와 모셨던 식당입니다.
두분 동서는 장모님은 춤을 추고, 동서는 장구를 치는 풍류를 아는 분였습니다.
언제 가도 친절하고, 음식에 정성이 들어있는 편안한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