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 용사 미망인 박순이 할머니
6.25 참전 용사 미망인 박순이 할머니
  • 편집부
  • 승인 2012.06.07 09:01
  • 호수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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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오른팔 잃은 남편과 칠남매 키워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참전 용사들의 희생을 기억하는가.

그들을 기억하는 건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참전 용사나 그들 가족의 삶에 녹녹치 않은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다. 6일 현충일을 앞두고 산외면 구티리에 사는 참전 용사 미망인 박순이(82세) 할머니를 만났다.

# 남편이 전투 중 부상당해 돌아와
영동군 심천이 고향이었던 박순이 어르신은 황해도에 살던 큰아버지의 소개로 황해도 사람인 남편 이지섭 씨와 20살에 결혼을 했다. 이때 남편의 나이는 24살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의 어수선한 시기에 결혼식을 올리고 얼마 안 돼 전쟁이 터졌다.

남편이 군대에 간 뒤 박순이 어르신은 친정이 있는 영동으로 내려가 생활하다 대구로 옮겨가 공장에서 비단 짜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남편의 생존 소식을 듣게 됐다. 남편이 박순이 어르신의 친정으로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리는 엽서를 보내고, 친정 오빠가 그 소식을 대구에 있는 동생에게 전해준 것이다.

박순이 할머니가 기다렸던 남편을 만난 곳은 마산국군 병원이었다.
남편은 지리산에서 전투 중 부상을 당해 오른팔을 잃고 몸에 파편이 박혀 치료를 받고 있었다.
박순이 어르신은 그렇게 전쟁에 나갔던 남편과 가슴 아픈 재회를 했다.
그때 부상을 당한 후 남편은 비가 오려고 하면 몸이 쑤시고 아파 긴 세월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70세에 남편인 이지섭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 화장한 남편의 유골에서 파편이 4개가 나왔다고 한다. 박순이 어르신의 부탁으로 남편의 유골에 자석을 갖다 댔더니 파편 4개가 나왔다는 것이다.

20대 젊은 나이에 몸에 박혀 40년 넘는 세월 동안 고통을 주었던 전쟁의 상처로부터 남편은 생을 마감한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박순이 어르신의 남편인 이지섭 어르신은 현재 대전 현충원 국군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 고생하며 산 건 말로 다 못해
박순이 어르신은 27살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3남 4녀의 어머니가 되었다.
어려운 형편에 일곱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친언니가 보은에 살고 있어서 남편과 함께 보은으로 오게 됐다는 박순이 할머니.
그때는 동네마다 다니면서 화장품 장사를 했다.

남편이 한쪽 팔이 없다보니 일하기가 힘들어 박순이 어르신이 생계를 위해 돈을 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남편이 산외면사무소에 '소사’로 취직돼 보은 읍내에서 산외면 구티리로 이사를 왔다. 벌이가 생기긴 했지만 수입이 많지 않다보니 형편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 남의 집에 품팔이를 다녔다. 모심기, 보리 베기, 누에치기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한달동안 숙식하며 청주 농촌진흥원에서 누에를 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자식들은 손수 밥을 해 먹으며 학교에 다녀야 했다.
박순이 어르신은 “고생하며 산 건 말로 다 못해. 안 해 본 일이 없어. 낮이며 밤이며 고생 많이 했지."라고 말하며 지나 온 세월을 떠올렸다.

50년 동안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지었다. 그때 나무를 짊어지고 오다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그랬던 것이 나이가 드니 허리며 목이 아파 고개를 돌리기도 힘이 든다.
일곱 자녀를 먹이느라 박순이 어르신과 남편은 끼니를 굶을 때도 많았다고 한다.
나보다 자식이 먹을 것을 먼저 챙기는 게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자녀들이 보은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돈이 없어 시내버스 차표도 한 달씩 외상으로 끊어가면서 가르쳤다.
박순이 할머니는 “애들도 고생 많이 했지" 하시며 “큰아들이 대학 시험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못 간 게 제일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큰아들뿐만 아니라 대학 공부를 못 시킨 건 칠남매 모두에게 미안하다.

먹고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 없이 억척스럽게 몸도 사리지 않고 일을 했다. 눈물을 흘린 날도 많았다. 오죽하면 눈물을 반찬 삼아 밥을 먹고 일을 했다는 말을 하시겠는가. 그 고단했던 삶을 살아오며 그래도 칠남매를 키우고 몸이 불편한 남편 곁을 지켰던 할머니의 눈물 어린 삶 앞에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현충일이면 박순이 할머니는 보은읍 남산 현충탑을 찾는다고 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 남편이 있는 대전 국군묘지까지 가는 것이 힘들어 못가고 대신 그곳에는 큰아들이 간다고 한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내가 가진 것 중 무엇을 얼마만큼 줄 수 있는가.

대한민국의 젊은 남아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고, 1년 9개월의 복무 기간을 마쳐야 한다. 지금도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순국선열과 참전 용사들의 희생은 기억돼야 한다.
김춘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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