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종이 위에 "인생을 담다"
흰 종이 위에 "인생을 담다"
  • 류영우 기자
  • 승인 2009.10.08 11:25
  • 호수 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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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한글날 어르신 글쓰기대회

할머니들이 활짝 웃었습니다.
딸로 태어난 것이 죄가 됐고, 어려웠던 가정형편으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할머니들에게는 한이 됐습니다. 나이를 먹어서는 부끄러워서 내색도 못했던 그 망할 놈(?)의 한글을 배우고 보니 속이 후련한 가 봅니다.
할머니들은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성들을 끄집어내 아름다운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처음 글을 배우고 쓴 글들이 조금은 투박해 보이지만, 할머니들이 살아온 인생을 꿰뚫습니다.

지난 7일 보은문화원에서 열린 제1회 한글날 어르신글쓰기대회는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밭이랑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듯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할머니들의 눈빛이 진지합니다.
아직은 서투르고 투박하기 그지없는 한글 솜씨, 아무렴 어떤가요. 늘 한구석에 외롭게 가려져 조명 받지 못했던 우리 할머니들에게 한글은 한줄기 빛이 됐습니다.
이제 그녀들은 까막눈이라고 쉬, 쉬할 필요도 없고, 버스를 잘못 탈까봐 조마조마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글쓰기 대회에 참가해 글솜씨까지 뽐낼 수 있으니, 그동안 배워온 한글공부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지요.

 

▲ 이번 한글날 어르신 글쓰기 대회에서 보은읍 학림리 임복례 할머니(사진 오른쪽)가 으뜸상을 수상했다. 수상 후 송영자 경로당 복지지도사(사진 왼쪽)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1.
어르신들이 돋보기를 치켜세우며 주름진 손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한글을 써 내려갑니다.
어르신들이 살아온 인생이야 소설로 쓰자면 몇 권이야 우습지만 아직은 한글이 서투른 탓일까요? 용지의 반도 못 채우고 전전긍긍하기도 합니다. 집에서 미리 써 온 연습장을 곁눈질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잠시 후,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어르신들은 정말 아름다운 글들을 쏟아냈습니다.

정관임(흙사랑, 74) 할머니는 가을을 참 아름답게 표현해 냈습니다.
"비를 많이도 뿌렸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어요. 니도 가을옷으로 갈아 입고 논의 벼도 노란옷으로 갈아입었어요. 뒷산, 앞산에는 주먹만한 밤송이가 많이도 달리고 포도나무에 포도도 주렁주렁 달렸어요. 저도 내 마음속에 심어논 나무 한그루 있어요."

장순임(흙사랑, 70) 할머니도 가을을 멋지게 글로 그려 냈습니다.
"어느새 가을이 왔어요. 가을 찬바람이 부는 구나. 산에는 울긋불긋 물이 들고, 들에는 황금빛이 들고, 과일이 주렁주렁 열렸어요. 길에는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개천에는 갈대꽃이 한들거립니다."

삼승면 달산1리 김용옥(63) 할머니는 가을이 오자 추수가 걱정인가 봅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걸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가을 문턱에 들어선 듯 싶더니 오늘 아침에는 아주 서리라도 올 것 같이 추웠다. 춤(추운) 탐을 하도 하고보니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제 한동안은 잘 놀았는데 앞으로 가을 추수하기에 한창 바쁠 것이다.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계절의 변화만을 표현해 낸 것은 아닙니다. 어르신들의 글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도 담뿍 담겼습니다.

장안면 봉비리 이국진(84) 할아버지는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팔남매 모두 몸 건강하고 모든일 잘 이루워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또 사랑하는 나의 내자 무명장수하길 비옵니다. 그리고 군대에 입대한 우리 넷째아들 손자 이동근 군복무 잘하고 제대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아들 오형제, 여자 손자들 다 몸건강하고 공부 잘하기를 축원합니다. 끝으로 딸 삼형제 모두 몸 건강하고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봉비리 이준자(70) 할머니는 추석 때 고향에 오지 못한 막내 아들이 눈에 밟히나 봅니다.
"즐거운 추석에 막내 요한이가 못와서 엄마는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명절에 근무하느라 얼마나 피곤하냐. 그리고 주원이가 아빠를 찾고 울었는지 모른다. 다음 명절에는 꼭 참석하여라. 막내아들아 몸 건강히 잘 있거라. 엄마가."

#2.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다고 평가하기 힘들지만 이번 한글날 어르신 글쓰기 대회에서 보은읍 학림리 임복례(77) 할머니가 최고상인 으뜸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을 마치고 임복례 할머니는 한글을 가르쳐 준 송영자 경로당 복지지도사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돈이 없어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딸의 눈물이 한이 됐습니다. 언제가는 그 한을 꼭 한 번 글로 쓰고 싶었는데 이렇게 상까지 받게 돼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멋진 수상소감도 밝혔습니다.

이밖에 박금숙(삼승면 천남리), 박내순(삼승면 달산리), 박복실(마로면 임곡리), 김길순(보은읍 풍취리) 어르신이 예쁜 손 글씨상을 받았고, 이주(장안면 봉비리), 박희열(마로면 관기리) 어르신이 향기나는 사람상을 받았습니다.

또 김정구(마로면 관기리), 정관임(옥천군 안내면), 라정순(산외면 장갑리), 김봉식(보은읍 수정리) 어르신이 아름다운 글상을 받았고, 허매자(탄부면 벽지리), 송경헌(마로면 관기리), 황숙희(보은읍 노티리), 이기분(마로면 관기리) 어르신이 소중한 글상을 받았습니다.

이날 글쓰기 대회에는 흙사랑 어머니학교, 경로당복지사회, 관기 글꽃피는 학교, 보은군 노인장애인복지관, 충북농아인협회 보은군지부 등 5개 단체에서 모두 81명의 어르신들이 참가했습니다.

상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이날 행사장에 모인 81명의 어르신들은 정말 뜻 깊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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