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병변 1급 장애인 염정복씨의 희망 만들기
뇌병변 1급 장애인 염정복씨의 희망 만들기
  • 류영우 기자
  • 승인 2011.12.15 09:32
  • 호수 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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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또 좌절, 그래도 희망을 품다

학교에서 신나게 뛰어 놀 던 10살짜리 꼬마아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루에 책가방을 던져 놓고, 마당 한쪽에 있는 샘에서 물을 마셨다.
물을 뜨려고 하는 순가, 그 꼬마아이는 바가지와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소아마비.
그 후 꼬마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했다.
꼬마의 엄마는 아이를 업고 다니며 뒷바라지 했지만, 꼬마는 점점 삐뚤어져만 갔다.
“병신."
“학교는 뭐 하러 다니냐. 집에나 있지."
또래 아이들이 내 뱉는 말은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됐다.
중학교에 진학을 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신과 다른 아이를 보며 흉을 보기 시작했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아이의 마음은 점점 더 삐뚤어져갔다.
하지만 다른 한쪽 가슴에선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니들이 더 잘사나, 아님 내가 더 잘사나."
그 아이를 만났다.
보은군 노인장애인복지관 한켠에서 만난 그 아이는 이제 43살의 성인이 되어있었다.
올해 43살의 염정복씨(회인면 중앙리)는 뇌병변 1급 장애인이다.
불편한 몸은 그대로였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암울했던 학창시절
10살이 되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린 염정복씨는 그 후,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다.
무엇보다 사회적 벽은 그에게 매우 높았다.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가는 문턱은 그에게 절벽이었고, 문턱을 가까스로 지나 계단과 마주칠 때면 아예 도망가고 싶었다. 햇볕 한 줌을 쐬기 위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거리 풍경을 보기 위한 바깥나들이라면 그나마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친구를 만나고, 물건을 사기 위한 나들이조차 혼자가기 위해선 그는 큰 결단을 내려야했고, 거의 대부분 엄마의 도움 없이는 행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랬던 그였다. 하지만 국내 장애인 재활복지의 산 역사이자 요람인 삼육재활센터 진학 후 그의 인생은 새롭게 바뀌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우선 다리 수술을 결정했다. 그는 천천히 걸을 수 있게 됐다.
걸을 수 있게 되자 무엇이든 배우고 싶다는 의욕이 부풀어 올랐다.
컴퓨터를 시작했다.
움직일 수 없는 한 손은 잠시 잊었다. 움직일 수 있는 한 손으로 꾸준한 연습을 한 덕에 120타까지 칠 수 있는 실력까지 올랐다.
틈틈이 디자인 공부도 열심히 했다. 이때의 노력은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을 잡는 게 큰 도움이 됐다.
대학 또한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궈냈다.
인형 눈 붙이고, 다리 맞추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를 충당했다.
잿빛 하늘에서 하얀 눈이 곧 쏟아질 것 같은 날에 찾아온 낯선 이방인과의 얘기가 깊어지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소위 잘 나가던(?) 시절로 흘러간다. 
그가 보유한 자격증은 목공예, 전자기술(수리), 도장기술 등 모두 11가지에 달한다.
그 중 가장 애착이 가고, 또한 힘들게 배운 기술은 도장기술이다.
무엇보다 도장을 파기 위해서는 한자를 익혀야 했고, 한자 공부와 도장 파는 기술까지 익히는데 무려 4년의 세월을 투자해야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바로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것도 국내에서는 유명한 문구전문회사에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틈틈이 디자인 연습을 했지만 특별히 자격증을 소지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자격증은 없어도 회사 관계자들이 인정을 해 주더라고요. 그렇게 문구회사에 입사를 하게 됐고, 첫 임무도 디자인이었어요. 이틀 동안 시간을 줄 테니, 중국에 수출할 상자를 디자인해 보라는 거예요. 그렇게 만든 상자로 2만개를 수출했고, 첫 월급으로 200만원을 받았습니다."
첫 월급을 받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이런 것이 돈이라는 생각, '돈은 쉽게 벌리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또 다시 좌절, 그리고 희망 찾기
문턱을 넘기보다 더 어려웠던 취업도 해 냈다. 한 발 앞을 가로막은 계단이라는 절망감도 이겨냈다.
하지만 삶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2009년 초, 일거리를 가지고 회사로 들어가던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교통사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운전석을 다른 차가 밀고 들어왔다.
뇌를 많이 다쳤다. 살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했다.
그렇게 2년을 병원에서 지냈다.
그리고 병원에서 퇴원해 고향으로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났다.
힘들 법도 한데, 그는 그래도 쉽게 상심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터라, 속 깊은 내공을 많이 쌓아온 터라, 그는 다시 일어났다.
우선, 도장도구부터 꺼냈다.
쉽지 않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도장도 파지 못할까’라고 생각했는데, 팔 수가 없었다.
감각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도 재활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 후 그는 열심히 도장을 팠다.
결국 그는 또 해냈다.
도장뿐 아니다. 그의 생활은 모든 것이 다 도전이다.
월요일에는 볼링을 친다. 화요일에는 컴퓨터를 배우고, 수요일에는 탁구를 친다. 목요일에는 배드민턴, 금요일에는 게이트볼, 그리고 주말에는 축구를 한다.
축구?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때, 도를 대표하는 장애인 축구선수였어요. 축구뿐 아니라 100m, 마라톤까지 뛰었는걸요. 그때 생각하면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어요. 축구요? 제가 제일 잘 했고, 또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이기고,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직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받아만 준다면 어디든 가고 싶어요. 일을 해 보고 싶어요. 그래야 저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요?"
뒤돌아서는 그의 굽은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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