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가 성가시다고 초가삼칸을 태우다니 …
빈대가 성가시다고 초가삼칸을 태우다니 …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5.25 09:35
  • 호수 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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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규 인
보은읍 장신리
보은군향토문화연구회장

보은읍 삼산리와 장신리 사이를 흐르는 냇물이 불로천입니다. 지난 5월 13일 삼산리 쪽 제방 위에 있는 가로수를 보은군에서 정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반 주민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냇물 쪽 제방에 있던 수령 30년이 훨씬 지난 느티나무 다섯 그루가 몽땅 잘려지고 그루터기만 남았습니다.
5월 18일 자 보은사람들에 실린 기사를 보고야 그 정확한 내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산4리 제방 밑에 거주하시는 주민들께서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이 거추장스러워 나무를 제거해 달라는 민원을 제기하셨고 그 민원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보은군에서 1천970만 원의 예산을 들여 가로수 정비사업을 시행한 것입니다.
존경하는 보은군민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이런 민원제기와 그에 따른 보은군의 민원 해결에 동의하십니까? 그날 아무런 잘못도 없이 그저 봄이면 신록을 피우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면서 제방 위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묵묵히 계절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던 나무들이 참혹하게 베어지는 광경을 목격한 보은군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어 느낀 소회를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강원도 원주시에서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과 자연과의 정의로운 관계를 강조하셨던 장일순 선생께서는 “나락 한 알에도 온 우주의 정기가 가득 차 있다”라는 말씀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저 역시 그날 그 말씀을 떠올리면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우주의 정기’ 대신 잘려지는 나무들이 느끼는 ‘고통과 원망’이 주위에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이번에 문제가 된 삼산4리 제방 밑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셨던 이원일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이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집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 10m의 제방을 양쪽 모두 오랫동안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오셨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방에서 잔디 이외의 잡초를 뽑아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노력 덕분에 삼산4리 제방 전체 중에서 유독 그 부분만은 잔디가 푸르고 건강하여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생존해계셨으면 아마도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낙엽을 청소하시면서 나무를 베어내자는 일부 주민들을 설득하셨을 것이고, 보은군에는 느티나무의 늠름한 수형(樹型)을 유지하는 선에서 일부 가지치기를 제안하셨을 것입니다. 이번에 이같은 일을 당하니 다시 한번 더 선생님의 부재(不在)가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지역에 참다운 어른이 계시지 않는 것이 이렇게 큰 손실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보은군은 소멸 위기 지역입니다. 소멸은 생명의 반대의미입니다. 소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은군에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어야 합니다. 군민 각자가 자신의 생활 터전에 꽃 한 포기 더 심고, 나무 한 그루 더 보살피는 것도 보은군이 소멸 위기에서 벗어나는 든든한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근본인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람도 나무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이같이 떨어지는 낙엽을 통해서도 우주의 이치에 대해 사유하는 특권을 누려왔습니다. 낙엽이 거추장스럽다고 민원을 제기하고 그 민원을 처리한다고 나무 자체를 베어내는 사려 깊지 못한 행정은 빈대가 성가시다고 해서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생명의 계절이라는 오월에 참으로 씁쓸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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