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와 정거장
편지와 정거장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5.18 09:15
  • 호수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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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성 수
속리산면 거주
시인, 수필가
충북작가회의 회원

  시인이 남긴 작품 중에 동시가 상당히 많았다. 다섯 권의 시집을 내었지만 동시집은 따로내지 않았다. 짐작건대 첫 시집 성벽이 1937년 간행되기 이전에 주로 쓴 동시들이 아닐까 한다. 휘문고보를 다닐 동안 습작했을 동시에서도 그의 빛나는 재능이 엿보이는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비록 서울이나 동경에 살 때의 동시이지만, 그의 동심 속에는 회인에서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편지」에서 시인의 어린 시절의 회인을 만나보자.

누나야, 편지를 쓴다.
뜨락에 살구나무 올라갔더니
웃수머리 둥구나무
조그만하게 보였다.
누나가 타고 간 붉은 가마는
둥구나무 고샅으로 돌아갔지,
누나야, 노랗게 익은
살구도 따먹지 않고
한나절 그리워했다.             (1936년작 「편지」 전문) 

  시집간 누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차분히 표현한 동시다. 3행에 나오는 웃수머리가 지금의 회인면에 있는 동네이름이다. 그 곳에 오장환 생가와 문학관이 있으니, 지금도 둘러보면 시인의 어린 시절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을 돌담 길 안쪽 어딘가에 둥구나무와 살구나무가 자라고 있고, 어린 시인의 까까머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정거장엔, 할머니 한 분,
차는, 벌써 떠나갔는데.
돌아가지도 않고,
기다립니다
어둑한, 길목엔,
깜작, 깜작, 등불이
키여졌어도,
막차가 떠나간 정거장서 할머니는 누구를
기다리시는지,
우두커니 서서,
돌아가지도 않고 기다리십니다.   (1936년작 「정거장」 전문)

  이 동시를 읽고 나서 다른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떠올렸다면 필자의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1982년작으로 46년의 차이가 있는데, 이를테면 후세대 시의 한 원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근대시의 개척기에 시인의 감성이 배여 있는 시가 있었기에 나중에 현대시의 성과가 가능하였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막차가 떠난 정거장에 혼자 서 있는 할머니와 깜빡 깜빡 켜져 있는 등불의 여린 불빛의 길목이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는가.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을 손자와 시인과 시인의 할머니가 서로 교차되면서 우리 가슴속 추억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어쩌면 시인의 생가를 돌아보고 나온 저녁 늦게 회인의 도로변 가로등에서 만날 수 있는 불빛과 시인의 시에서 만나는 그 불빛이 서로 다르지 않는 감성을 전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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