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탄부면 덕동리
(69)탄부면 덕동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5.11 09:40
  • 호수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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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살기좋은 마을이 될거라는 희망이 꿈틀되는 탄부면 덕동리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이형손(李亨孫, 1418~1496)장군의 부조묘와 이명백 장군의 묘가 있어 호국정신이 살아 있는 덕동마을 
이번주는 보은읍 남쪽 15km지점에 있는 탄부면 덕동리를 소개한다. 
덕동(덕골)리는 언덕배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마을로 백로서식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풍년을 기약하는 단비를 맞으며 새재고개(장암에서 덕동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가는데, 여기저기 모를 심는 이양기와 로터리를 치고 있는 트랙터들이 분주히 오고간다. 
필자가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새재고개를 넘어가는 이유는 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물 좋은 찬 샘과 삼승골이 있기 때문이다. 삼승골은 신라와 백제의 경계부분으로 알려져 있고, 밖에서는 보이지 않아 일반인들은 찾아가기 힘든 지역이다. 이곳에 삼성혈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임진왜란당시 덕동리에 살고 있던 청송 심씨(靑松沈氏), 가평이씨(加平李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세 성씨(姓氏)가 함께 피란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이다. 또한 신라장수 3명이 이곳에서 피난처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마을이기도 하다. 
덕동리는 가평이씨(加平李氏)세거지(世居地)중 한곳으로 세조시대와 많은 연관이 있는 마을로 지금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이형손(李亨孫, 1418~1496의 부조묘가 있는 마을이다. 이시애의 난은 1467년 세조의 정책에 반대한 회령부사 출신 이시애가 일으킨 난이다. 
이시애는 세조의 중앙집권체제에 반발하여 호족과 도민들을 규합해 난을 일으켰는데, 약 4개월간의 투쟁을 했지만 아우와 함께 체포되어 효수되었던 인물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북도 유향소를 폐지하고 세조의 중앙집권정책은 가속화 되었다. 
한편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의하면 이형손 장군은 임금을 호위하는 내금위소속 무관으로 벼슬을 시작해 정3품이 된 후 군권을 총괄하였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 의하면, 1467년 5월22일 행호군(行護軍) 이형손과 우의정(右議政)홍윤성 등으로 하여금 이시애 반란군 평정대책을 세워 병조판서(兵曹判書)박중선 등과 황해도 군사를 거느리고 증원군(增員軍)으로 출전 이시애토벌 선봉장으로 참전 하였다고 한다. 또한 홍윤성은 보은 회인 부수리 출신으로 세조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영의정을 지낸 홍윤성의 이야기는 회인 편에 기술하기로 하겠습니다. 이형손의 부조묘에서 한동안 사진을 찍고 있으니, 덕동리 이재현 이장님께서 무슨 일 때문에 사진을 찍는냐고 궁금해 하신다. 

#희망의 물결이 꿈틀되는 덕동리는 최근 “샛들마을사업”에 선정되어 환골탈태(換骨奪胎) 중에 있는 마을
마을이야기 소개를 위해 이형손 부조 묘를 찾아 왔다고 하니 들어오라고 하시면 필자를 안내하신다. 몇 년 전 귀농을 하셨다는 이장님은 이 마을 출신이고 이형손의 세손이며 현재 부조 묘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덕동리는 샛들 마을사업에 선정되어 진행 중에 있으며, 마을사업이 끝나면 지금의 덕동리보다 더욱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거라고 자랑이 대단하시다. “우리 마을은 익산 군수를 하셨던 이형손의 둘째아들이 덕동인근에 가평이씨 세거지(加平李氏 世居地)를 만들었습니다.” “이장님 어렸을 때 마을이야기 좀 들려주시지요?”하고 필자가 말을 꺼내니 “우리 마을에 들어오시면서 보셨을 겁니다. 마을 앞 봇들은 두루미 집단 서식지로 유명하지요. 지금도 가보시면 두루미가 많이 살고 있을 겁니다.” “마을오기 전 두루미 서식지를 돌아보고 왔는데요. 재두루미 100여 마리가 둥지에 있는 것을 보고 왔답니다.” “두루미가 많이 있다는 것은 그 만큼 환경이 깨끗하다는 증거이니 이곳 농산물은 친환경 농산물이겠군요?”하고 필자가 물어 보니 “우리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축산물은 깨끗한 환경과 맑은 물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풀질이 좋다고 소문이 났답니다. 마을 앞 벽지방향으로 직진하다보면 작은 산이 있는데요. 그곳에는 너븐바우(넓은 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바위가 있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친구들과 그곳에서 뛰어 놀 정도로 넓고 큰 바위가 있었답니다.” 지금도 그 바위가 있나고 물으니 지금도 있다고 하신다. 또한 석화리 넘어가는 곳에 병풍바위가 바위가 있고, 삼성 골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세 성씨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랍니다. 돌 꼬지에서 매화 넘어가는 장고개가 있고, 청룡 재라는 곳도 있지요. 이곳은 돌 꼬지에서 벽지 넘어가는 고개랍니다. 이장님과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연신전화 벨이 울린다. 바쁜 일정에도 내색하지 않고 필자의 질문에 친절히 응해주시는 이장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마치고 나오는데, “저곳이 이명백 장군의 묘랍니다.”하시면서 이형손 부조 묘 옆 큰 묘를 가리킨다. 깜짝 놀라 “여기에 이명백 장군의 묘가 있다고요?”하며 반색을 하니 “저곳이 이명백장군의 묘랍니다.”하고 재차 확인시켜주신다. “그럼 원정리에 있었던 장군의 묘가 이쪽으로 이전되었군요?” “약 20년전 이곳으로 이장을 했답니다.”하신다.
사실 필자가 몇 달 전 이명백장군의 묘를 찾아 원정리 장군봉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명백장군의 묘로 추정되는 곳은 파묘가 되었고, 그 자리엔 석상만 있어 실망을 하고 돌아 온 적이 있었다. 이후 찾을 길이 없었는데, 뜻밖에 이곳에서 이명백 장군의 묘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장님의 안내에 따라 묘를 찾아가니 묘지는 잘 관리되고 있었다. 이명백 장군은 중봉 선생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했던 보은출신으로 수한면 휴율사에 봉안된 분으로 적암리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신 분이다 그분의 정려각(旌閭閣)이 탄부면 하장리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은은 크게 이름을 날리진 않았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 많이 있는 지역이다. 
덕동마을 또한 나라가 위험해 처했을 때 누구보다 앞장서 나라를 지킨 분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다. 이장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너른 바위를 찾아가니 산 입구에 100여 평은 됨직한 마당바위가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봇들에서 모내기를 하다 새참 때가 되면 너른 바위에 둘러앉아 맛있는 새참을 먹고, 선소리꾼의 구성진 농요를 함께 불렀을 덕동사람들의 흥겨운 풍년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탄부면 덕동리 마을전경.
탄부면 덕동리 마을전경.
덕동 백로서식지.
덕동 백로서식지.
이명백 의병장 묘.
이명백 의병장 묘.
너븐바위.
너븐바위.
이형손 부조묘 충훈사.
이형손 부조묘 충훈사.
이형손 부조묘 충훈사.
이형손 부조묘 충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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