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탕방] (67)탄부면 구암리
[우리마을 탕방] (67)탄부면 구암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4.27 09:26
  • 호수 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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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모양의 큰바위가 있어 귀바위 또는 구암리라 불리는 마을

#청동기 문화인 거북모양의 고인돌이 마을을 지키고, 교통요충지로 한때 주막거리가 있을 정도로 번창했던 구암리 마을
벌써 구암리 용보들에는 물을 들이기 시작한다. 물을 들이고 트랙터로 로타리를 치고 있는 농부들은 올해도 풍년을 기원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넓디 넓은 용보들을 누비고 있다. 
이번주는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구암(龜巖)이라고 부르는 탄부면 구암리 마을을 소개한다. 
구암리는 보은읍 동남쪽 약 25km지점에 있는 탄부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있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마을회관에 들어서니 농사철이라 그런지 이곳에도 텅 빈 회관만이 필자를 반기고 있다. 
회관을 나와 마을 깊숙한 곳 고인돌이 있다는 곳으로, 찾아가니 커다란 바위 두 개가 공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공터 앞 어느 집안에도 거북이모양으로 보이는 바위하나가 보인다. 집주인을 불러보니 농사일을 가셨는지 아무도 없다. 
공터 앞 큰 바위를 살펴보는데, 개석식 형식의 고인돌인 듯 두 개로 쪼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개석식 형식은 커다란 돌을 무덤위에 직접 올려놓는 방식이다. 아마도 구암리 고인돌이 그런 형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인돌을 한 참 바라보고 있으니 지나가던 주민 한 분이 궁금했는지, 나에게 다가와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하고 묻는다. “마을 소개 글을 쓰려고 어르신들을 만나 뵈러 왔다”고 하니 “요즘 농사철이다 보니 모두들 농사일을 하느라고 마을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하며,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하신다. 
“우리 마을은 예전부터 새터라는 곳이 있었고, 안뜸, 중뜸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었지요, 그리고 마을주위에 세개의 동산이 있는데, 동오리산, 가운데 동산, 용보동산이라 부르고 있답니다. 이 동산들은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거랍니다.” 마을주민과 이야기를 끝내고 중뜸이라고 부르는 마을안쪽 길을 따라가는데, 또 하나의 마을경로당이 보인다.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을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니 친절히 이야기를 해주신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마을사람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던 용보산이 있는 마을
“우리 마을은 옛날에 동제를 지내던 곳이 있답니다. 용보아래 작은 동산이 있는 데, 그곳에서 매년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동제를 지냈었지요.” 
지금도 동제를 지내고 있냐고 물으니 “아니요. 지금은 동제를 지내지 않지만 예전에는 해마다 정월 열나흘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곤 했지요. 참 그때가 그리워지네요. 그때는 마을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도움 받고 했지요. 상부상조하는 마음이 우리 마을 자랑이었지요.” 하시며 필자의 손을 잡고 용보라고 불리 우는 작은 동산을 가리킨다. “저기가 용 바위가 있었던 용보동산이랍니다.”하시며 가리키는데, 무심코 보면 그냥 지나칠 것 같은 작은 동산 하나가 눈에 보인다. “우리 마을은 안뜸, 아랫말, 중 뜸이라고 불렀던 마을들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구암이라고 부르고 있답니다. 안뜸 위쪽에 주막거리라는 곳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던 곳이랍니다. 내 나이가 80이 넘었는데요. 예전에 우리 어렸을 때만해도 우리 마을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지요. 지금은 농지정리를 해서 옛날 지형이 아니지만 농지정리하기 전에는 여기가 보은, 관기, 원남, 청산, 화령으로 가는 길목이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주막거리가 있었을 정도지요.” “그 당시는 구암리가 북적 북적 했었겠는데요?” “그럼요. 지금이야 조용하지만 옛 날에는 오고가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답니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 유래비를 찾아가 살펴보았다.

#전통과 미풍양속(傳統跨 美風良俗)을 지키며 충효사상(忠孝思想)을 숭상하고 인, 의, 예, 지, 신(仁, 義, 禮, 智, 信)을 지키며, 황금보다 경서한권을 중요시 하는 마을 
우리 마을은 속리산이 정기를 이어받은 국사봉이 주산이요. 구병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고, 우측으로는 주산이 이어져 백호를 이루고, 안산 운무산은 이 마을을 배웅하고, 오동산은 마을을 둘러쌓아 옹호하며, 속리산에서 발원한 보은의 젖줄인 청룡수 삼가 천과 백호수 보청천이 구절부리에서 만나 생기를 약동하니 마을의 안녕은 물론 장래 희망이 약속되는 천혜의 진리인 곳이다. 우리 마을은 조선선조임금 때 경기도 이천으로부터 추산 이만복 선생이 임진년 전란을 피해 낙향우거(落鄕寓居)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거북모양을 한 큰 바위가 있어서 귀 바위 또는 구암(龜巖)이라 일컬었다. 상관, 중관, 하관(上官, 中官, 下官) 마을을 관리(官里)라 칭하여 일반적으로 관말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왔으나 1914년 마을 안에 아홉 개의 바위가 있다하여 구암리(九岩里)라 개칭하였다. 9개의 바위 중 1979년 경지정리와 1980년 미증유(未曾有)의 수해로 세 개가 매몰되어 현재는 6개만 존재하고 있어 마을의 연륜을 말없이 나타내고 있다. 삼가천의 맑은 물을 이용하여 구암들의 옥토에서 생산되는 쌀은 전국에서 유명한 탄부 쌀의 주산지이며 주민모두가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지키며 충효사상(忠孝思想)을 숭상하고 인, 의, 예, 지, 신(仁, 義, 禮, 智, 信)을 높이 찬양하며 선인의 가르침이 있으니 자손에게 금을 광우리로 준다해도 경서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는 둔촌이집선생의 말씀을 이어가고자 한다. 천혜의 길지(吉地)와 선인(先人)의 가르침에 힘입어 교육열이 높아 명망 있는 법조인, 행정가, 박사, 석사, 학사(法曹人, 行政家, 博士, 碩士, 學士)가 속출하고 있으며, 출향인사와 마을주민이 한 마음이 되어 서로 돕고 사랑하며 웃음꽃이 피는 화합된 마을로 발전하기를 빌며 마을 비를 세운다고 쓰여 있다. 구암리 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저 멀리 고봉산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이 필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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