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탐방 … (65)탄부면 임한리
우리마을 탐방 … (65)탄부면 임한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4.12 19:41
  • 호수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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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숲을 가진 탄부면 임한리

세상은 온통 이름 모를 꽃들로 가득한 계절이다. 숲이 많은 동네 임한리(林閑里)를 소개한다. 
임한리(林閑里)는 보은읍 동쪽 10km지점에 있는 마을로 탄부면에 속한 마을입니다. 임한리 마을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사와 지역 역사를 공부하시는 분들과 함께 동행해 일찍 출발했다. 우리 일행이 일찍 출발한 이유는 보은 팔경중 하나인 임한리 숲의 아침풍경을 보기 위함이었다. 
보은팔경은 보은에서 뛰어난 경치 8곳을 말한다. 현실하고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소개해 보겠다. 
①임한영형 : 임한리 소나무 숲 사이로 밥 짓는 연기가 나지막이 흘러가는 아름다운 풍경 ②고성추월 : 가을밤 삼년산성에 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달의 모습 ③보청어화 : 짙은 어둠속 보청천에서 횃불을 들고 고기 잡는 아름다운 모습 ④속리단풍 : 속리산 가을 단풍의 아름다운모습 ⑤법주모종 : 법주사에서 들려오는 저녁종소리에 나그네의 마음을 울려준다는 뜻이고 ⑥천봉운해 : 천왕봉 위로 한가로이 흘러가는 조각구름이 아름다운 모습 ⑦금적낙조 : 금적산에 드리워진 아름다운 저녁노을의 모습 ⑧노송접객 : 정이품아래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임한리 소나무 숲은 250년 넘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지금도 사시사철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아오는 명소이기도 하다. 
이곳 입구에는 임한리 들판을 옥답으로 만드는데, 공헌한 당운 유창식 선생 공적비(塘雲 兪昌植先生 功績碑)가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창식 선생은 삼가저수지 축조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분으로 밭으로 이루어진 임한리 들판을 논으로 만들도록 수리조합을 조성하고, 지금의 임한리를 잘사는 마을이 될 수 있게 노력하신 분이다. 

#조선왕조의 오기된 가계를 시정하여 바로잡은 광국지경록판목(光國志慶錄板木)대명회전을 가지고 귀국한 송당 유홍선생의 비가 있는 충효사상이 높은 마을
임한리 솔밭에는 송당 유홍선생의 공덕비(功德碑)와 시문(詩文)이 있어 살펴보는 데, 송당 유홍선생은 많은 시와 문장을 남기셨다. 그 중 시 두수를 새기니 그 하나는 나라에 충성(忠誠)을 다한 시(詩)요. 또 하나는 부모(父母)에 효도(孝道)를 다한 시(詩)이다. 선생이 1587년 변무사(辨誣使)로 명(明)에 들어가 200년의 숙원이던 종계변무를 고두유혈간청(叩頭流血懇請)끝에 시정(是正)하여 바로잡은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지고 귀국(歸國)하니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만조백관(滿朝百官)을 거느리고, 서대문 명율관(西大門 慕率館)까지 나와 변무사 유홍 선생을 맞이하여 크게 기뻐하시고, 종묘(宗廟)에 유고(告由)하고,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리니 국조일대경사(國朝一大慶事)라 이로 인해 부군(府君)에게 광국일등공신(光國一等功臣)의 훈(勳)을 내리셨고, 부군(府君)이 귀로산해려(歸路山海閭)을 떠날 때, 明의 주사 마유명(主事 馬維銘)이 시(詩)한수를 지어 전별(餞別)함에 부군(府君) 또한 시(詩) 두수를 지어 화답(和答)하였다....(중략)라고 쓰여 있다. 
유홍 선생의 발자취는 불목리 소재에 있는 기계 유씨 영모재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천장에 숨겨져 있던 광국지경록판목(光國志慶錄板木)이 발견되었는데, 판목은 조선시대 종계변무( 宗系辨誣)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학술적가치가 높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64호로 등록되어 있고,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국지경록판목(光國志慶錄板木)은 선조가 1587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을 마치고, 기념하기 위해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짓고 화답한 내용을 모아 1701년 편찬한 것을1744년 영조 24년에 다시 새긴 판목(板木)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는 명(明)에 조선 왕조의 잘못 전해진 가계에 대해 오기된 것을 정정요구 한 내용인데, 그 과정과 내용을 이곳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임한리는 안정지처(安定之處) 길성조림(吉星照臨)이 숲속에 비치고 있어, 신선이 모이는 피란지방(避亂之邦)으로,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도로변에 있다는 격암유록의 비설에 따라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 조성된 마을로 전해진다.
소나무 숲을 둘러보고 마을회관을 찾아가니 주민 예닐곱 분이 이야기를 나누시고 계신다. 마을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니 올해 91세 되셨다고 하시는 어르신 한분이 “20살에 시집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 동네는 샘이 많이 있는 마을이랍니다. 지금도 3개가 남아 있고 예전에는 8곳이 있었다”고 하신다. 특히 “마을 뒤로 흘러가는 삼가천은 애기소, 함박소 등 깊은 소가 많아 물고기가 많이 살았다”고 하신다. 지금도 샘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장소를 여쭈어 보니 “중 뜸으로 들어가 고삿에(골목길)하우스 옆, 담 새간(담 사이)에 있으니 찾아가면 된다고 하신다.” 
어르신들의 옛 말을 듣고 있으니 정답게 느껴진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선구 (85)어르신께서 왁자지껄한 소리를 듣고 방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우리 마을은 기계유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여러 성씨가 살고 있습니다. 처음 마을이 생긴 것은 격암유록(格庵遺錄)에 나오는 상제지자 북두칠성이 있는 곳으로 길성(吉星)이 비추니, 이에 따라 안정지처(安定之處) 길성조림(吉星照臨)이 숲속에 비치고 있어, 신선이 모이는 피란지방(避亂之邦)으로, 여러 사람이 왕래하는 도로변에 있다는 비설에 따라 비결서를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옛 어른들께서 말씀하셨다”고 하신다. 격암유록(格庵遺錄)은 조선명종 때 사람으로 격암 남사고(格庵 南師古.1509~1571년)가 선인(仙人)을 만나 전수받았다고 전해지는 예언서라고 한다. 옆에서 김선구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어르신도 한 말씀드린다고 하시면서 이 이야기는 꼭 기록해 달라고 하신다. “우리 마을 앞에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은 유병찬 이장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워준 공덕비입니다. 유병찬 님은 솔밭 숲에 있는 유창식 님의 당질이고, 임한리 마을을 잘사는 마을로 만들어 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임한리 마을사람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디선가 훈훈한 봄바람이 필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듯하다. 아마도 임한리 마을을 잘살게 만들도록 노력하신 기계유씨 종친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선한 마음이 봄바람과 함께 불어오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돌아왔다.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계유씨 제실
마을샘.
마을 안길
임한리 마을 유래비.
임한리 마을회관
임한리 소나무숲.
임한리 소나무숲.
유창식 선생 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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