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탐방 … (64)마로면 변둔리
우리마을 탐방 … (64)마로면 변둔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4.05 19:38
  • 호수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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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공동체 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마로면 변둔리

보은사증항(報恩四甑恒) 중 하나인 남증에 해당하는 시루 산 아래 큰 골을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 변둔리와 갈전(치랏골)리를 소개한다.
변둔리는 보은읍 남쪽 35km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한때 주막거리가 있을 정도로 변화했던 마을이다. 
변둔리를 찾아가는 길은 봄의 향기가 가득하고 산과 들에는 이름 모를 꽃 들이 지천에 널려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수령 약 300년은 넘음직한 당산나무와 돌탑 두 개가 좌우로 웅장하게 서있다. 수 백 년 동안 마을의 안녕을 지켜왔는지 노거수의 모습에서 깊은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마을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회관은 여느 시골과 별반 다름없이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마을회관 건립당시 땅과 거액의 헌금을 기부했다는 밀양후인박운하송덕비(密陽后人朴雲夏頌德碑)와 남양후인 홍공엄석기념비(南陽后人洪公奄錫紀念碑)등 기념비만 회관을 지키고 있다. 마을회관 옆 절골 가는 길을 따라 언덕길을 올라가니 좁고 구불구불 옛 고삿길이 이어진다. 
한참을 올라가다 어르신 한분을 만나 마을소개를 부탁하니, 올해 92세 되셨다고 하시면서 19살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다고 하시면서 마을이야기를 해주신다. 
“현재는 몇 가구 살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 우리 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살아답니다. 마을 앞 큰길에는 주막들이 많았지요. 거기를 주막거리라고 불렀답니다.  그리고 마을에 들어오면서 커다란 나무를 보았는냐”고 물으신다. “입구에 들어오면서 거목 두 개와 돌탑 두 개를 보았다.”라고 하니 “그 나무가 오래 전 부터 있었던 나무이고 마을사람들이 정성을 드리는 나무인데, 예전에는 음력 1월 14일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 고사를 지내곤 했답니다. 지금은 안타깝게 동 고사를 지내고 있지는 않는다”고 하신다. “몇 년 전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당산나무들이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는데, 군청에서 정성을 들여 관리를 하니 지금은 다시 살아나고 있는 중”이라고 하신다. “마을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나무들을 망치면 안됩니다. 돌탑과 큰 나무들은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지요. 함께 가꾸고 보존하고 관리하여 마을의 번영을 이루어야 합니다.” 92세의 노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하시고, 마을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고자하는 마음은 여느 마을사람들 못지않은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 변둔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을안쪽 작은 개울에서 봄나물을 뜯고 있는 분들을 만나 마을의 내력을 물어보니 마을사람들이 아니고 잠시 놀러 왔다 마을 분들이 깨끗한 나물이 많으니 얼마든지 뜯어가라고 해서 뜯는 중이라고 한다. 
변둔리는 마음 넉넉한 순박한 사람들이 깨끗한 마을을 지키며 정을 나누고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는 갈전리를 찾아갔다. 

#보은 사증팔항(報恩 四甑八項)에 해당된다는 시루산 아래 남원양씨(南原梁氏), 밀양박씨(密陽朴氏)들이 하나둘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 증항(甑項)과 갈전(葛田)마을
갈전리는 옛 부터 칡이 많은 마을이라 해서 갈전(葛田)이라 했는데, 갈전리를 찾아가기 전 변둔 주막거리를 지나 증항을 먼저 찾아갔다. 보은군 사증팔항(四甑八項) 중 하나인 시루산을 끼고 있는 증항은 변둔리와 함께 시루산 바로아래 자리하고 있는 작은 마을로 남원양씨(南原梁氏)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라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시루산은 떡시루(떡 찌는 옹기그릇)처럼 생긴 산으로 옛 전설에 의하면 국난이 일어나면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한곳인 속리산을 찾아가고, 그 중에서도 사증팔항(四甑八項)에 피난처를 정하라는 속설이 있어 남원양씨(南原梁氏)들이 증산에 오고, 시루봉 꼭지에 해당하는 변둔리(卞屯里)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가 피난을 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갈전리는 증항과 통합하여 지금의 갈전리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며, 치랏골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칡이 많아 치랏골 또는 갈전(葛田)이라고 부르는 마을로 효자 정재수가 설 명절을 지내러 가다 아버지와 함께 숨진 효자고개가 있는 마을
갈전리는 1974년 1월22일 차례를 지내러 청산면 법화리에 있는 큰집으로 가던 아버지와 9살 정재수군이 보은군 마로면 마루목재에서 폭설에 묻혀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정재수군이 웃옷을 벗어 아버지를 덮어준 채 함께 숨진 일이 있었다. 당시 효자 정재수군의 효심을 본보기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크게 알려 졌던 사건이었다. 효자 정재수군이 숨진지 50년이 지난 지금 마루목재에 있는 효자 정재수군의 묘를 찾아가보았다. 15년전 필자가 정재수군의 묘를 처음 찾아갔을 때는 허름한 안내판 하나마 덩그러니 있었는데, 최근에 누군가 관리를 하고 있는 듯 비교적 잘 정돈된 모습이다. 한때 우리들에게 효의 상징으로 불리었던 정재수군의 추모비 하나라도 세워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서는데, 트럭한대가 멈추더니 5~60대로 보이는 한사람이 정재수군의 묘지를 살펴본다. 인사를 하고 효자 정재수군의 이야기를 아는 냐고 물어보니 잘은 모르고 최근 정재수군의 이야기를 듣고 오신 거라고 한다. 그리고 정재수군의 어머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인사를 건네고 떠나간다. 우리일행도 인사를 건네고 마루목재를 넘어 청산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돌아오는 길에 한때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효자 정재수군의 이야기를 나누며, 요즘처럼 공동체 정신과 상경하애(上敬下愛)의 정신이 사라지고 개인주의화 되어 가는 세태에 대해 우려를 하며, 때 지난 점심을 먹으러 청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마로면 갈전리 전경.
마로면 갈전리 전경.
마을입구 당산나무.
마로면 변둔리 전경.
주막거리.
효자 정재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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