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마로면 세중리
(62)마로면 세중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3.23 09:57
  • 호수 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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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이라는 세중리(世中里), 마을에 대한 자부심으로 문화와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마을

춘분 앞이라 그런지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이번주는 세상의 중심 마로장터가 있었던 세중리를 소개한다. 
세중리는 보은읍 남쪽 약 35km떨어진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역마를 먹이던 곳이라 해서 역마 촌 또는 마루라고 불리었던 마을로 마로면의 원소재지마을이다. 
특히 조선시대에 관리들이 오고가며 숙박을 했던 보통원이라는 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한 때 주변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곳이다. 6~70년 전후만 하더라도 매주 5일장이 있었고 특히 대추시장이 열렸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단위농협분소, 세중초등학교, 보건지소 등 시골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기관들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는 마을이다. 
세중리를 찾아가는 길은 봄의 기운이 올라오듯 여기저기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원정리 다리를 지나니 대추말리와 돌베기들, 장터 앞들에는 논갈이를 하는라 트랙터가 연신 바쁘게 오고간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저 멀리 바래봉이 웅장하게 보이고 그 옆으로 북 바위가 필자를 맞아준다. 마을입구에 세워져있는 8개의 비석들이 눈에 띄어 자세히 살펴보는데, 비석들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던지 내용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마모되어있었다. 

#마을입구에 비석거리를 조성하고 마을의 정신과 선조(先祖)들의 공덕(功德)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상경하애(上敬下愛)의 정신이 강한마을 
문학원 직원 백공낙선청덕비(文學院直員白公樂善淸德碑)가 세워져있고, 유학전공용제송덕비(留學全公溶劑頌德碑)가 있는데, 유학이라고 쓴걸 보니 벼슬은 하지 않고 공부에 몰두하신 전용제님을 기리는 비석인 듯하다. 그 옆으로 면장 곽무종거사불망비(面長郭武種去思不忘碑)가 있는데, 아마도 곽무종 면장께서 마을에 큰 공헌을 했나보다. 다음으로 정이품백공원길송덕비(正三品白公元吉 頌德碑)가 있고, 그 옆으로 행군수김후기윤영세불망비(行郡守金侯基潤永世不忘碑)가 있는데, 1903년에 건립했다고 한다. 김기윤 군수의 불망비는 보은읍 동헌 앞에서도 볼 수 있다. 아마도 마로면에 큰 공헌을 했나 보다. 그 옆으로 행군수홍후종옥영세불망비(行郡守洪侯種玉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마지막으로 은사배보현육영기념비(恩師裵甫鉉育英紀念碑)가 세워져있는데, 배보현은 1922년부터 1961년까지 초등교육에 몸 바쳤던 인물로 관기초등학교를 끝으로 교육계를 떠난 인물이다. 비석거리 앞으로는 1935년에 세중 공립간이 학교로 개교한 세중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초등교육에 힘쓰고 있는 명문학교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파발마들이 쉬어가고 선비들이 머물다가는 역마촌이 있어 한때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마을 마로면이라는 행정구역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마을
비석거리를 지나 마을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회관을 찾아가니 어르신 두 분이 퍼즐게임을 하고 계신다. 어르신들께 인사를 하고 마을소개를 부탁하니 “내가 올해 82살 되었는데요. 20살에 시집와서 학교 옆에서 장사를 했지요, 그때는 학생수가 700명이 넘었답니다. 운동회를 한번하면 하루매출이 2~300만원이 넘었지요. 술과 음료수를 2~30상자씩 팔았으니 장사가 얼마나 잘되었는지 몰라요. 그 당시는 너나할 것 없이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지요. 아이들이 과자를 집어가도 못 본척하기도 했지요.” “우리 집 어른이 아이들이 얼마나 먹고 싶으면 그러겠냐”고 하시면서 “남는 거로 우리가 먹고 살면 되는거 아니냐”고 하시더라구요. “그때는 다들 어렵게 살았지만 마음만은 넉넉하게 살았어요. 여기가 원래 마로장터였어요. 우리 친정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여기가 대추 말이라했어요. 대추가 많이 나와 대추 시장이 열렸었다고 해요. 우리 집에도 대추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대추밭에서 하루 종일 대추지키느라고 엄청 힘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니 봄바람이 훈훈하게 불어온다. 마을회관 앞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 유래비를 살펴보는데, 소백산 맑은 정기 시루봉 맺혀있고 샘솟는 황계들과 사말 리가 우리들의 터전이라 남으로 우뚝솟은 범뎅이가 마을을 지키고 재방골 삼형제에 선비님이 넘나들며 쉬어가던 보통원 역마촌(普通院 驛馬村)이 자리하던 마루장터… 나라의 중대사를 전달하던 파발마(擺撥馬)가 마을의 상징이 되니 우리의 자랑 일세, 왕래면(旺來面)과 합칠 적에 역마 촌(驛馬村) 우리 골 이름마저 마로면(馬老面)이 탄생되고, 갑인 년(甲寅年)에 안골을 병합하여 인간사(人間事)의 중심(中心)이라 세중(世中)이 탄생되니 하늘아래 낙원이라 상경하애(上敬下愛) 우애(友愛)로 화합(和合)하는 바탕으로 복지마을 이루어 대대손손 이어가리라 고 쓰여 있다. 

#6개반 이름을 우리의 고유이름으로 불리 우고 있을 정도로 우리고유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
유래비를 뒤로하고 마을을 둘러보는데, 회관에서 어르신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고 있는듯하다. “우리 마을은 6개 반으로 되어 있는데요, 신기반, 북암반, 중촌반, 중앙반, 동방, 내동방으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세중리는 1반, 2반으로 되어 있지 않고 옛 마을이름으로 반을 나누었나 보네요” 하고 물었더니 “우리 마을은 옛날 마을이름으로 반을 나누었어요.” 마을을 탐방하면서 종종 느끼는 것은 옛 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들을 많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비록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지만 자신들의 뿌리를 중요시하고 마을에 내려오는 전통과 문화를 이어가려고 애를 쓰는 모습에서 우리선조들이 지키려했던 공동체 정신과 보은의 정신인 의리(義理)를 나름의 방식으로 지켜내고 유지하려고 하며,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보은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고장이라는 것을 느끼곤 한다. 
세중리 어르신들의 말씀에서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것이 보였고, “세상의 중심 세중” 이라고 쓰여 있는 마을 이정표를 입구에 세워놓은 세중리 사람들을 보니 세중리의 정신과 문화를 주체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것을 느끼고 돌아 왔다.
양화용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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