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탐방 … (61)마로면 오천리
우리마을 탐방 … (61)마로면 오천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3.16 09:42
  • 호수 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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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좋고 공동체의식이 강한 마을, 마로면 오천리

#좌측은 일봉산 우측은 울미산 배후에는 삼승산 태자 봉이 둘러싸고 비조령(飛鳥嶺)강이 휘돌아가는 마을  
보은읍 남쪽 35km지점에 있는 마로면 오천리를 소개한다. 모처럼 보은에서 한국역사를 공부하는 지인들과 함께 동행(同行)하기로 하였다. 
요즘 들어 보은에도 많은 분들이 사라저가는 지역역사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지역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지역의 정신을 찾아가는 소중한 과정이라고 본다. 조선시대 수많은 명사들이 보은에 우거(寓居)하며 보은지역사람들에게 심어 놓은 선비정신이 되살아나는 듯한 생각이 든다. 오천리가는 길은 관기삼거리에서 청산방향으로 약 10여분 정도 직진하다. 오른쪽 작은 내를 따라 들어가면 오천리 마을이 나온다. 오천1리 마을입구 수호나무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비조재(飛鳥峙)가 보이고 좌측 일봉산과 우측 울미산을 끼고 있으며, 배후산으로 삼승산 태자 봉아래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이 오천리 이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수령 약 280년 된 느티나무가 봄비를 맞으며 우리일행을 반기고 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가볍게 내리던 빗줄기는 봄바람과 함께 더욱 굵어진다. 봄 가뭄이 심해 농부들의 마음이 타들어 갔는데, 그런 농부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렸는지 단비가 내려준다. 우리일행이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83세, 82세, 85세 되었다는 어르신들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비 오는데, 무슨 일 때문에 오셨나요?”하시며 들어오시라고 하신다. 낮선 이들을 경계하지 않으시고 반갑게 맞아주시는 어르신들을 보니 오천리 마을사람들의 열린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일행은 먼저 마을이야기를 듣고자 찾아 왔다고 방문목적을 말씀드리고, 인사를 하니 올해 92세 되셨다는 어르신께서 “19살에 시집와서 이 마을에서 6.25를 겪으셨다고 하신다. 당시 대구까지 걸어서 피난을 다녀왔답니다. 참 많은 고생을 했지요.” “그때는 길도 좋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많은 고생을 하셨겠군요?” “그럼요. 길은 무슨 길이 있나요. 그저 사람하나 다니는 좁은 오솔길이 전부였지요. 당시는 다리라는 게 없었어요. 있어봐야 돌다리가 전부였지요. 가끔 나무로 놓은 다리가 있긴 했는데, 그런 다리는 거의 없었어요.” 아마도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나무다리는 섶 다리를 말씀하시는 듯하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어르신들이 당시의 아픔을 말해주시며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고 하실 정도로 공동체 의식이 강한마을. 
“혹시 마을 앞에 돌다리가 있었나요?”하고 필자가 어르신들에게 여쭈어보니,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85세 되었다는 어르신께서 “네 있었지요. 마을 앞 냇가에 돌다리가 있었는데요. 그 다리는 왠 만큼 비가 많이 와도 떠내려가지 않았지요. 참 튼튼한 다리었답니다. 아마도 그 다리가 홍교(虹橋)라고 하는 다리였을 것 같네요.” “홍교요?” 우리는 홍교(虹橋)라는 소리는 못 듣고 그냥 저 앞마을에 갈 때는 그 돌다리를 건너 다녔지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이 마을까지 동족상잔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려고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니 옛날에 원남(元南)장을 한번 다녀오려면 절골에서 부터 열 두 머리를 돌아가야 원남(元南)을 갈수 있는 데, 그곳에는 비녀바위라는 것이 있었답니다. 비녀바위 앞에는 신랑바위가 있는 데, 신랑 각시 서로 바라보다 일 년에 한번 만난다고 전해지는 전설이 있는 바위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광산이 들어와 부서 졌답니다. 또한 우리 마을에는 비조재(飛鳥峙)라는 곳이 있는데요. 그곳에는 찬 샘이 있었지요. 옛날 비조재(飛鳥峙)를 넘어 탄부면 대양을 넘나들었는데요. 고개를 넘다보면 목이 말라 찬 샘에서 묵을 축이면 그 고개를 다 넘도록 목마름이 없었다고 해요. 지금도 갈수 있나요? 네 지금도 갈수는 있는데 길이 많이 없어졌답니다. 요즘에는 그 길을 넘어 다닐 필요가 없어 한동안 가보지 않았으니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하시며 “아이고 손님들에게 커피한잔도 못 드렸네,” 하시면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신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 회관을 나와 마을 자랑 비를 살펴보았다.

#인심 좋고 경로효친(敬老孝親)함이 뛰어난 마을로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전통(傳統)을 물려줄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오천리(梧川里) 
관기 청산 방면으로 6km지점 6개 촌락으로 1,2구로 나뉘어진 고장으로 마을입구에 약 400년 넘은 느티나무가 오고가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1361년 고려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경상도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에서 환도(還都)길에 오를 때 관기에서 주필하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원남을 지나 환행하였다한다. 그 이후 이 마을을 나오(吾) 임군군(君) 올래(來)자를 써 오군래(吾君來) 또는 오천리라불리어지고 공민왕이 넘었다는 대왕산 태자봉이 마을서쪽에 우뚝 서 있다. 한때 금동이라 불리기도 하고 사방이 명산과 비조령 강으로 둘러싸인 고장에 강진이씨(康津李氏), 인동장씨(仁同張氏) 최초로 촌락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이후 문화유씨(文化柳氏), 전주최씨(全州崔氏), 등 20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1974년에 전기가 들어오고, TV가 들어와 문화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1979년 보청천을 이용한 양수시설로 천수답(天水畓)을 면하게 되었고, 1992년 경지정리와 함께 기계화 영농을 하게 되었다. 1997년 군(郡) 지원금과 출향인사들이 협조하여 30여평 경로당을 건립하게 되어 어른공경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게 되었고, 경로효친(敬老孝親)을 생활화하여 인근 주민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옛 부터 인심 좋고 경로효친(敬老孝親) 함이 뛰어난 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후손에게 기대하노니 위의 아름다운 傳統을 기리어 행할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고향과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노라 이제 우리들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온 주민 모두가 서로사랑하고 도우며 성실하게 일하여 살기 좋은 복지마을을 건설 떳떳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주겠다고 쓰여 있다. 
양화용 시민기자

오천리 마을전경.
오천2리 마을전경.
마을회관
오천리 당산나무.
오천리 마을 유래비.
오천리 연자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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