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없이 상부상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로면 소여리
욕심없이 상부상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로면 소여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3.02 10:57
  • 호수 6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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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열린 사람들이 덕업상권(德業相勸), 환난상휼(患難相恤)등을 함께 하며 욕심 없이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소여마을  

이번주는 보은읍 동남쪽 30km지점에 있는 소여리는 1800년대 조선의 정신을 일깨웠던 개혁파 김옥균이 조상 묘를 썼다고 전해지고 있는 마을로 지하자원이 많이 나오는 마로면 소여리 마을을 소개한다.
계절은 벌써 입춘이 지나 우수이고, 우수(雨水)는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서리가 녹아 빗물이 된다고 우수라 했다는데, 오늘 아침 날씨는 제법 쌀쌀하다. 아마도 떠나고 싶지 않은 동장군이 월고지(용천산)의 아름다움에 마지막 미련을 두었나 보다. 월송산 상고대를 보니 갑자(甲子)를 지난 우리 일행을 생각해 계절의 늦장이 고맙게 느껴진다는 지인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누가 말했던가 세월의 속도가 50세는 50km, 60세는 60km로 달린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소여리 마을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 있는 회관 마당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주민들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고 계시고, 마을을 지키는 선돌과 느티나무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지켜주고 있다. 
운동하시는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회관 안으로 들어서니 어르신들 여섯 분이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인사를 하고 마을 이야기를 듣고자 왔다고 방문 목적을 말씀드리니, 올해 83세라고 하신 주민 한 분이 “내가 21살에 시집와서 이날까지 소여리에 살고 있는데, 마을 사람끼리 다투는 걸 한 번도 보질 못했다”고 하신다. “우리 마을은 갈등이 없는 마을입니다. 여기 옆에 있는 사람하고 나하고, 한 달 사이에 이곳으로 시집왔는데, 그때는 트럭을 타고 왔어요. 넓은 길이 없어 트럭이 도랑으로 오는데, 정말 힘들었답니다.” “그러셨군요. 가마 타고 오셔야 되는데, 트럭을 타고 냇가로 오셨으니 덜컹거리고 무척 힘들었겠네요.” 

#모두가 어려울 때 광산업이 성행하던 소여리는 1리 1교라고 할 정도로 마을이 번성했던 마을 

“어휴 말도 마세요. 그것뿐만이 아니랍니다. 시집오자마자 새벽밥 먹고, 들이고 산이고, 나가 일해야지 많은 식구들 식사 준비해야지, 그거 끝나면 산으로 나물 뜯으러 가야지, 정말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르신 한 분이 한마디 거들어 주신다. “올해 내 나이가 92세인데, 고추 농사 짓느라고 말도 못하게 고생했지요.” “맞아요. 옛날 어르신들이 고생을 하셔서 지금 이만큼 잘살고 있는 거지요. 이제는 편하게 오래오래 사셔요. 어르신들이 밝고 건강해야 자식들이 행복하게 사는 거랍니다. 지금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잖아요.”하고 필자가 아는 체를 하니 올해 95세 되었다는 어르신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우리 마을은 중방이며 가새뜸이라고도 합니다. 마을 위쪽으로 굴봉재가 있는데, 그 뒤로 사기장골이 있지요.” “옛날에 사기를 굽던 곳인가요?” “예, 사기를 굽던 곳이지요. 그리고 꽃밭말, 삼막 골, 뒷골, 안뜸 등이 있답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데, 지금은 다 떠나고 없답니다. 세월이 많이 변했지요.” 

산나물과 산약초가 많이 나는 시루산의 모습.<br>
산나물과 산약초가 많이 나는 시루산의 모습.

#석탄과 백회 탄광이 있을 정도로 지하자원과 그에 못지않게 각종 산나물 약초가 많이 나는 시루산이 있는 마을 

“특히 웃터(소여2리)는 맷돌 바위가 있고 시루산 밑에는 범 바위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답니다.” “혹시 국시 바위라고 하는 바위인가요?”하고 필자가 여쭤보니 “그것은 잘 모르겠고, 옛날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신 분이 이곳에다 조상 묘를 쓰셨다고 하더라구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어르신 한 분이 시루산 바위 이야기를 해주신다. “혹시 국시바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며 필자가 되물으니 “국시 바위인지는 가보지 않아서 자신도 정확한 것은 모르신다”고 하신다. 
“옛날에는 무슨 바위인지도 모르고 시루산으로 고사리 산나물 뜯으러 많이 갔었지요. 시루산은 각종 산약초와 산나물 등이 많이 나는 산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을 뒤쪽으로 병풍바위가 있고 조상 골로 넘어가면 서당 골이 나오는데, 예전에는 그곳으로 적암을 넘나들었다”고 하신다. 
“중눌리 먹뱅이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를 차돌배기재라고 부르지요. 흰 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백회를 구웠다고 하더라구요.” “소여는 정말 지하자원이 많이 있는 곳이네요.” 
어르신들의 적극적인 마을 자랑을 듣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버렸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이야기를 마치고 회관 밖을 나오니 초봄 날씨가 여전히 쌀쌀하다. 마당 한 켜에 서 있는 선돌 옆에 유래비가 있어 살펴보았다.

#교육열이 남다르고 빈부격차(貧富隔差) 없이 서로가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며 공동체 정신이 투절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  

본래 탄부면 소여리로서 사전에 성민들은 다량의 석탄이 매장된 걸 예측한 듯 광산촌이 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탄부면 소여리가 마로면에 편입되었다. 동북간에 북 바위는 엄숙하게 솟아있고 동남간 시루봉은 방원 함이 웅장하고 경상북도 도계는 조선시대 구워 내온 사기 흔적이 분명하여 사기장골로 불리어 오고, 남쪽에는 긴 골짝 안에 절터가 있어 절 골이라 불리어 오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어 인심 또한 둥글도다. 교육열이 남달라서 1개리 1개교를 부락 중심에 세워 놓고, 빈부 차별 없는 마을, 상호협조 투철하여 효자효부(孝子孝婦) 많은 마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천추만대(千秋萬代) 이어가자고 써있다. 
마을 유래비를 뒤로하고 시루산을 찾아가는데, 골짜기 길이 좁고 굽어져있다. 한참을 올라가니 저 멀리 시루산이 보인다. 자동차가 갈 수 있는 곳까지 들어간 일행은 150년전 조선의 개화에 앞장섰던 젊은 정치인의 열정과 이루지 못한 이상을 한탄하며 처참히 무너졌던 열혈 정치인(熱血 政治人)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한동안 시루산을 바라보고 돌아왔다.
양화용 시민기자

마로면 소여리 마을 안길.
소여리 방송대의 모습.
마로면 소여리 마을 앞 쉼터.
월성후인 김학록 공덕 불망비.
소여리 마을회관 앞 선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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