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과의 인연
둘레길과의 인연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02.23 09:19
  • 호수 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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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심 웅 섭
해바라기문화공작소 대표
회인면 눌곡리

내가 처음으로 둘레길을 만난 것은 15년 전쯤, 제주도 올레길을 통해서였다. 책과 언론을 통해서 올레길이 알려지자 궁금증에 제주도를 찾았고, 멋진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오솔길을 따라 아내와 함께 걸었었다. 일단 산이 아닌 평지에서 길을 따라 걷는다는 개념이 참으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하, 걷기 위해 꼭 한 지점을 찾아가서 산을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니구나. 평범한 밭둑 길, 숲길과 마을 길을 걸어보니 뜻밖에 아기자기한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게다가 옛날에 쓰이던 마을 길들을 따라 시간여행까지 할 수 있었으니, 둘레길은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였다.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이 관광산업이라는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 직접 여행이라는 무형의 상품을 직거래한다는 점에서 통쾌하기까지 했다. 
 이후에도 직장을 다니는 틈틈이 둘레길들을 걸었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둘레길이 유행하면서 각 지방 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둘레길들은 지역에 따라서 조금씩 느낌은 달랐지만, 공통의 맛도 있다. 일단 안전하고, 부담 없고, 무엇보다도 사람 냄새가 난다. 길을 걷다 보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을과 일상을 보고 만난다. 나의 생활방식과 일상에만 갇혀서 살던 나에게 나와 다른 지역, 다른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나의 삶을 비추어주는 거울과도 같다. 늘 흥미롭고 감동스럽고, 때로는 위안을 준다. 등산에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맛이다. 
 정년퇴직 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아내와 함께 걸었다. 장장 800여 km의 길을 매일 20여 km씩, 34일 만에 걸어 낸 것이다. 그 먼 거리를 차가 아닌 오로지 나의 발로만 걸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기존의 관광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여행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나의 인생은 충분히 위로받고 힘을 얻었다. 그 후로도 둘레길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보은에서 은퇴자의 삶을 사는 우리 부부에게 가까운 세조길, 속리산 둘레길, 대청호 오백리 길은 이제 오래된 친구처럼 편하고 고마운 존재들, 아니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올봄부터 나는 둘레길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바로 사단법인 속리산 둘레길에서 숲길 등산지도사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작년에 사무국의 도움으로 괴산 구간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 적이 있었는데, 이게 인연이 되어 숲길 등산지도사라는 걸 알게 되고 자격증을 딴 데 이어 아예 근무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둘레길을 맘껏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등산복을 입고 도시락이 든 배낭을 메고 출근하자면 마치 소풍 가는 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동료들과 길을 걸으면 뺨에 닿는 차가운 공기, 발과 다리를 통해 전해지는 대지의 묵직한 느낌이 내게 큰 위안과 행복감을 준다. 어쩌다 둘레꾼들에게 코스를 소개하는 안내 트레킹을 맡게 되면 그건 또 다른 즐거움이다. 대부분 둘레길과 걷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니 처음 만난 사이라도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들에게 우리 지역의 속리산 둘레길을 소개하고 안내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게다가 앞으로 속리산 둘레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기록하는 부수적인 업무까지 맡게 된단다. 조금 있으면 새싹과 꽃들이 피어나고 새들이 짝짓기하느라 분주할 텐데, 그런 모습들을 빠짐없이 사진 찍고 기록할 걸 생각하면 지금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34년간, 나는 공영방송에서 PD로 일을 했다. 비교적 자율적인 분위기와 적지 않은 급여,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고마운 직장, 감사한 직업이었다. 그런 직장을 다니면서 내가 부러워한 직업이 바로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직원이었다. 남들은 돈과 시간을 써 가면서 어렵게 가야 하는 명산들을, 월급 받으며 일삼아 오를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국립공원은 아니지만 이제 나는 둘레길로 걸으러 출근한다. 내가 부러워하던 일을 직접 하게 된 것이다. 새봄에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속리산 둘레길에서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평범해 보이는 마을 길과 숲길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꽉 찬 행복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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