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요집회에 매번 참석했었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서울 수요집회에 매번 참석했었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 송진선
  • 승인 2022.12.27 13:54
  • 호수 6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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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낳고 싶어 환장을 했지만 후유증 때문에 아기 못났어”

기자가 이옥선 할머니를 처음으로 만나서 취재한 것은 2009년 2월 말이다.

 이옥선 할머니는 1년 365일 태극기를 게양하는 할머니로 유명했던 분이다. 2009년  3.1운동 90주년을 맞아 인물 취재를 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이옥선 할머니다.

위안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죄스러웠고 이옥선이란 이름을 밝히는 것도 죄스러웠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부터 13년전인  2009년 보도됐던 기사를 공유한다.

요즘 3.1절은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며 일제치하를 되짚어 보고 또 가정마다 태극기를 다는 분위기가 아니라 하루 놀 수 있는 휴일로 치부하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이날만 되면 태극기가 더 떠오르고 장롱 깊이 간직하고 있는 태극기를 꺼내보며 눈물을 짓고 있는 한 할머니가 있다.

일제치하에서 일본군들의 노리갯감으로 끌려갔던 위안부 이옥선(83) 할머니이다. 인구도 많지 않은 지역이라 할머니를 지상에 공개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할머니의 피해사실을 알려 적어도 일제에서 해방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열들이 숭고하게 목숨을 잃고 피해를 입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선열들의 고마움조차 잊고 있는 우리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할머니의 허락 하에 지면에 보도한다.

그 할머니는 지금 비가 새고 찬바람이 드는 집에서 돌보는 이 없이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다. 할머니는 3·1절에도 홀로 보낼 것이다. (편집자 주)

2009년 당시의 이옥선 할머니의모습이다. 정면 모습의 사진을 찍는 것도 죄스러워 그냥 생활하시는 모습을 촬영하겠다고 하니 기꺼이 응해주셨었다.  속리산의 2월은 아주 한겨울 날씨보다야 덜하지만 그래도 찬기운이 매서울 정도였다. 빨래가 말랐는지 만져보는 할머니 모습을 얼른 촬영했다.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할머니 얼굴 부분이 자연스럽게 처리돼 그나마 "휴~" 하고 안도했었던 기억도 난다. 우리 할머니가 아닌데 할머니가 그립다.

◆10대에 위안부로 끌려가

대구시 변두리 가난한 집의 맏딸이었던 이옥선 할머니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정확하게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15, 6세때인 그야말로 꽃띠였다. 1남2녀를 놓고 엄마가 작고해 13, 4세의 이런 소녀는 집안 살림의 멍에를 짊어지고 그야말로 살림밑천 역할을 했다.

당시 누군지는 모르지만 군속으로 가야 한다며 무조건 끌고 갔다. 아마도 당시 엄마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딸을 숨겼을 텐데 딸을 숨겨주지 못한 아버지는 동네의 여러 처녀와 함께 끌려가는 딸을 그저 볼 수밖에 없었다. 대구역에서 20여명의 여자들과 함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아주 오래오래 기차를 탔다.

기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보니 내편은 한 명도 없었고 생면부지의 땅인 중국 땅이었다. 왜 이런 곳에 데려왔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팔팔뛰었으나 불가항력,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일본군인들의 위안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질긴게 목숨이라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하루 지나가면 지나가나 보다하고 삶을 포기한 생활을 계속했다.

2년간 일본군의 위안부로 살면서 놀라고, 구덩이에 산 사람을 밀어 넣고 그 안에 불을 질러 죽이는 일본군의 만행을 보고 놀라고, 일본 패망 후에는 소련놈 따발총 소리에 놀라고…. 위안부로 있던 2년동안 매일 놀라는 상황이 계속됐다. 지금도 그때가 떠올라 깜짝깜짝 놀라고 가슴이 진정되지 않을 때도 있다고 한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에 의해 구출돼 신의주까지 온 후에는 집에 가는 일이 막막했다. 2년간 하도 놀라서 정신이 없었고 머리가 멍해졌기 때문이다. 겨우 겨우 대구 집을 찾아가 가족들과 회포를 풀었지만 딸의 불행을 막아주지 못했다며 자책하는 아버지를 볼 수가 없어서 집에서 생활하기도 힘들어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집을 뜰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때가 19살이다.

한 창 청소년기를 겪으며 방황하고 또 자존감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시절, 할머니는 나라 잘못 만난 탓에 겪지 말아야 할 고통을 겪으며 지우고 싶은 청소년기를 보냈다.유년 운이 나쁘면 중년 운, 말년 운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할머니 말씀대로 무슨 팔자를 그렇게 타고나서 끝까지 속을 썩이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타지를 떠돌며 장사를 했지만 할머니는 몸을 누일 곳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어찌어찌하다보니 우리지역까지 들어왔고 보은인심이 하도 좋아서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생활력은 강해 이 것 저 것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런 할머니를 눈여겨 본 사람이 가난하지만 착하다며 한 남자를 소개했고 할머니는 43세의 늦은 나이에 혼자 나이어린 5남매를 키우고 있는 남자(당시 47세)의 아내가 되었다. 원삼에 족두리를 쓸 수 있을까 했는데 그래도 소망은 이룬 셈이었다. 그때 막내아들이 10살이었다.

애기를 낳고 싶어 환장을 했지만 위안부로 있을 때 어떻게 했는지 할머니는 이미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 돼 자식 하나 없이 남의 자식 5명을 길렀다. 남의 자식이지만 공부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멸치장사, 옷 장사, ‘양은그릇’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막내와 그 위의 아들은 그래도 고등학교까지 가르칠 수 있었다.

몸은 고달파도 할머니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남편이 백방으로 뛰고 함께 놀러 다니기도 하고 셋방살이를 하다 양옥을 짓는 등 한 때 사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가정의 안정을 찾을 즈음 그런 남편도 세상을 등졌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내 피붙이라고 생각한 그 자식들도 모두 할머니 곁을 떠나 23년째 인기척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고 있다.

◆이젠 태극기 달 기운도 없어

살면서 보니, 지울 수 없는 과거에 속이 상했다. 그래서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죄와 함께 배상을 요구하는 서울의 수요집회에 매번 참석했다.

일본에도 일곱 번이나 다녀왔다. 일본 학생들 앞에서는 증언도 했다. 억울함이 새록새록 기억나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서울 집회에 갔다 올 때마다 가슴이 더 아팠고 분노에 치를 떨어야 했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을 용서할 수 없었던 할머니는 그래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달기 시작했다. 나라가 없으면 국기를 게양하지도 못할 텐데 요즘 국민들은 태극기 달기조차 실천하지 않으니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할머니는 새벽3시에 깨면 찬물로 목욕하고 나라가 잘되게, 세계 일류국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오후 6시 이후에도 태극기를 하강하지 않아도 되면서 할머니 대문에는 1년365일 태극기가 펄럭였다. 하지만 이것도 지난해까지의 일이다.

바람에 태극기가 찢어지기 일쑤였고 대문기둥에 달아놓은 깃대꽂이도 부러졌지만 밥해먹기도 힘들고 걷기조차 힘든 할머니는 태극기 꽂이를 교체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1년 365일 하루같이 태극기가 펄럭이던 할머니 집에는 더 이상 태극기가 게양되지 않았다.

이제 할머니가 챙기는 것은 오로지 약이다. 아주까리기름을 먹고 헛개나무와 느릅나무 등 5, 6가지를 달여서 먹는다. 하루에 3번도 먹고, 4번도 먹는다.

할머니는 “안 아픈 데가 없다. 사는 게 저승이다. 고통스럽다 그래도 낫지는 않지만 어떤 것 때문에 진정되는지 모르지만 약을 먹는 동안에는 몸이 편한 것 같다”고 말했다.

봉사단체에서 해다주는 김치와 밑반찬으로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할머니는 웃풍도 세고 방바닥도 불기운이 들지 않아 지난 해 현관문을 다시 달고, 천정을 공사하고, 전기보일러를 설치하고, 병풍으로 창문을 가려 찬바람을 가렸더니 올 겨울은 그런대로 따뜻하게 보냈는데 이젠 지붕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비가 오면 지붕이 새서 손을 봐야 하는데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살고 또 나라에서도 해주지 않는다며 여름철 장마가 오기 전에 고쳐야 한다며 조급해 했다. 할머니는 몸은 이미 병이 들어 낫기는 어려우니까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이대로 살 수면 좋겠고 지붕고치는 것을 소망으로 꼽았다.

꽃다운 나이에 불가항력으로 희생당한 후 되돌릴 수 없는 팔자를 껴안고, 배 아파서 나은 아이 한 명 없이 83세 노구의 몸으로 외롭게 지내는 할머니의 사연을 들으면서 소망치고는 너무 소박하다고, 하지만 절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3, 4시면 일어나 성경에 나온 말씀을 공책에 쓰고 6시면 텔레비전 뉴스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할머니의 소망이 올 여름이 오기 전에 독지가의 도움이든, 정부의 지원이든 간에 이뤄지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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