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지방의 생활문화유산(39)-생활문화 (석유풍로)
보은지방의 생활문화유산(39)-생활문화 (석유풍로)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2.1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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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근,현대사박물관에 전시된 풍로의 모습이다.
파주 근,현대사박물관에 전시된 풍로의 모습이다.

보은지방은 1970년대까지도 농촌에서는 온돌문화가 유지되어, 부엌 아궁이에 무쇠로 만든 큰 가마솥과 작은 가마솥, 양은솥을 걸어두고 아궁이에 나무를 태워서 난방을 하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빨래를 삶고 살았지만, 보은 읍의 중심지역은 나무대신 아궁이를 개량하여 연탄(구공탄)을 태우거나, 연탄용 새마을보일러를 사용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연탄은 다 타고나면 새 연탄을 갈아주어야 하는데, 갈고 나서 오랜 시간은 화력이 약하여 아침을 준비하기가 힘들어 남편의 출근이나, 자식들의 학교 시간에 늦지 않게 하려고 애를 먹었다. 이때 등장하여 많은 어머니들의 선망이 되었던 것이 석유풍로(곤로)였다. 
우리의 전통 풍로(風爐)는 화로(火爐)의 일종으로, 아래쪽에 바람의 양을 조절하는 구멍을 만들어 풍로라고 한 것으로 구리, 쇠, 흙, 돌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 주로 숯을 사용하였는데,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식으로 곤로(焜爐)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에 석유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76년(고종13)으로, 그 이전에는 소나무의 옹이인 광솔이나 들기름, 콩기름으로 밤에 불을 밝히다가 석유가 들어오면서 우리가 옛날에 보아온 심지를 가운데 꼽는 사기로 만든 호롱이 사용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동네 가게에서도 석유를 파는 등 널리 보급된 상태에서, 일본에서 개발된 석유곤로(石油焜爐)가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부피도 작고, 이동하기 쉽고, 화력 조절이 가능하며, 언제나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등 편리하여, 1970년대 이후에는 부엌 취사도구의 대명사가 되어 인기 있는 혼수품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가난한 집 어머니들은 찬장 사발에 돈을 조금씩 모아 석유곤로를 구입하고 너무 좋아, 좁은 방안에 들여 놓고는 연신 닦으며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석유곤로는 바닥 기름통에 잠겨 있는 심지를 로라로 끌어올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심지를 내려 공기를 차단해서 끄도록 만들어 졌다. 석유는 기름통 위에 있는 뚜껑을 열고 투명한 플라스틱 파이프를 기름통과 연결하여 넣던가, 깔데기를 꼽고 기름통을 들어부어 채웠으나, 잠깐 실수가 나면 온 부엌바닥에 석유기름이 넘쳐 석유냄새로 밥을 못할 때도 종종 발생하고는 하였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심지는 불에 강한 유리섬유를 사용하였지만, 그래도 오래 사용하면 심지가 짧아져 화력이 약해지고, 그을음이 많이 생겨 심지를 전문적으로 교환해주는 장수마저 생겨나, 동네골목을 돌아다니며 ‘석유곤로 심지 갈아요’하고 외치며 다니기도 하였다. 
석유곤로는 1990년 초부터 LPG나 도시가스를 사용하는 가스레인지가 나오면서 빠르게 사라졌고, 이제는 전기를 사용하는 전자레인지를 원룸까지 설치하는 등 생활양식이 변화되어, 석유곤로는 거의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자취조차 찾기가 어렵게 되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우리의 소중한 생활도구였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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