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탐방(49)-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살기좋은 곳으로 인정한 마로면 관기리
우리마을 탐방(49)-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살기좋은 곳으로 인정한 마로면 관기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1.24 10:26
  • 호수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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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용 시민기자

우리의 산, 들, 실개천까지도 우리 조상들이 정겹게 불러주던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시작하는 마을탐방을 통해 우리마을 지명에 얽혀 있는 숨어 있는 전설과 선인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공업화, 현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젊은이들의 탈농, 그리고 직장을 찾아 이농하면서 마을의 현실은 고령의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을소멸이라는 우울한 미래를 점치기도 하지만 조상이 남긴 마을에는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습니다. 주민의 삶의 터전인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하며 마을탐방 연재를 시작합니다.


마로면 관기1리 전경.
마로면 관기1리 전경.
마로면 행정복지 센터.
마로면 행정복지 센터.

#조선시대 영남에서 보은을 지나 한양으로 가는 나들목으로 왕래원이 있을 정도로 옛 부터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인정한 마로면 관기리
이번 주는 조선시대 역마(驛馬)를 먹이던 곳 마로면 관기리를 소개한다.
관기리는 보은읍 동남쪽 약 25km 지점에 있는 면소재지로 고려 말 공민왕이 상주를 지나 북상할 때 잠시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는 지역이고, 조선시대 상주에서 보은, 청주, 한양으로 가는 나들목 역할을 했던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관기리는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1751년 저술한 택리지 팔도총론 충청도편에 관대(마로)는 속리산 남쪽에 위치하며 들은 넓고 땅이 기름져 가장 살만한 곳이다.
“이 고을은 대추가 잘되어 대추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기도 한다”라고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좋은 터를 많이 지니고 있는 곳이다.
관기리는 현재도 마로면 행정복지센터와 보건소 등 각종 행정기관이 밀집 되어 있는 중심지 마을이다. 특히 이곳은 시골답지 않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음식점이 있어 이날도 음식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태화루”라는 허름한 간판을 걸고 짬뽕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식 식당인데, 인심 좋은 주인장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짬뽕은 이 지역에서 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식당이다.
마로면은 중국식 식당 외에도 전국적으로 꽤 인기 있는 식당이 여러 곳 있다. 인구 2천명의 작은 지역이지만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곳 식당들의 특징을 보면 대부분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 옛날 마로를 지나 한양으로 가는 영호남 나그네들의 배고픔을 알아주었던, 이곳 지역주민들의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을 회관을 찾아가니 이곳도 여는 마을과 같이 문은 굳게 잠겨있다.

옛 성당의 모습.
옛 성당의 모습.
관기 천주교 성당 종.
관기 천주교 성당 종.
관기 마을 회관.
관기 마을 회관.

#관기리는 기묘명현(己卯名賢) 병암 구수복(屛庵 具壽福)의 묘비가 있고,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이 큰 인물이 나올 것을 막기 위해 산혈을 끊어버렸다는 구렁 고개를 가진 충절의 마을
늦가을 짧은 해는 어느덧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타고 온 차를 시장안에 주차를 하고 게이트볼장을 찾아가니 평소 안면이 있는 마을 주민들 예닐곱 분이 운동을 하고 계신다. 인사를 나누고 마을 소개를 부탁하니 역사에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하시면서 함께 운동하고 계시는 한 분을 소개해 주신다.
인사를 드리고 성함을 여쮜니 이름 밝히길 꺼려 하신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운동을 멈추고 마을 소개를 적극적으로 설명해 주신다.
“우리 마을에 강칭이 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옛날 보도연맹사건 당시 세중리 사람들 16명이 죽임을 당했던 곳이랍니다”
이곳도 동족상잔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지역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혹시 구렁고개를 아십니까?”라고 물어보신다. 필자 또한 지역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대충은 알고 있었다.
“구렁고개의 전설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이 산세를 보니 큰 인물이 나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산혈을 끊어버렸다는 고개로 기묘명현(己卯名賢) 능성인(綾城人) 병암 구수복(屛庵 具壽福)의 묘비가 있는 고개랍니다. 묘비는 조선 숙종(朝鮮 肅宗)시절 세우고 비문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이 지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군요. 병암 구수복은 조선 전기 이조좌랑을 지낸 분으로 1519년 기묘사화 당시 재상들이 예문관 관원들을 파직하기를 청할 때, 사관을 모두 파면하면 오늘날 기주(記注)는 누가 담당해 닦으 오리까. 하고 항의했을 정도로 기계가 높았던 분이라고 한다. 또한 조광조 등을 치죄(治罪) 할 때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성운(成雲)을 승지에 임명하자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는 등 사림파의 성격을 띠어 군직(軍職)으로 좌천되었는데, 이준경(李浚慶) 명종의 고명대신이었으며,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그 힘으로 구례 현감에 재직 중 사망했던 분이라고 한다. 충암 김정 선생(과도 도의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마로면 관청의 시발점이 있을 정도로 마로면 중심의 행정 복합 마을
“우리 마을에는 관기의 행정관청시발점을 가지고 있는 집이 있답니다. 면사무소 골목길을 따라가면 막다른 곳에 대문 있는 집인데요. 옛날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그 집이 관기의 관청이 들어서는 시발점이었다고 하더라구요. 처음에는 서당으로 있었는데, 우체국으로 사용하다 지서(지구대)로 사용했다고 하더라구요. 또 하나 옛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마로에는 병암서원 또는 병산성원이라는 서원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위치와 문헌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마로에도 서원이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네요. 나중에 문헌자료를 찾아봐야겠네요”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느덧 가을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물어 간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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