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탐방(48)- 장안면 불목리
우리마을 탐방(48)- 장안면 불목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1.17 09:47
  • 호수 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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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통을 중요시하며 인심좋은 사람들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마을

우리의 산, 들, 실개천까지도 우리 조상들이 정겹게 불러주던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시작하는 마을탐방을 통해 우리마을 지명에 얽혀 있는 숨어 있는 전설과 선인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공업화, 현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젊은이들의 탈농, 그리고 직장을 찾아 이농하면서 마을의 현실은 고령의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을소멸이라는 우울한 미래를 점치기도 하지만 조상이 남긴 마을에는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습니다. 주민의 삶의 터전인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하며 마을탐방 연재를 시작합니다.<편집자 주>


불목리 마을 전경.
불목리 마을 전경.
불목리 앞 우진플라임 전경
불목리 마을 전경.
불목리 마을회관.

불목리는 보은읍 동남쪽 20km지점 구병산 아래 자리 잡고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불목리는 마로면 수문리 북쪽 마을로 마을 뒷산은 증골과 지방 안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고, 좌우로 봉비로 넘어가는 서느고개, 수문리 넘어가는 솔밭고개가 있는 마을이다.
이곳도 변화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던지 몇 년 전 우진플라임과 청원상주간고속도로 속리산 IC가 인근에 있어, 교통 편리한 도농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는 약 20여 가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으며, 몇 년 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광국지경록판목(光國志慶錄板木)을 보유하고 있던 기계유씨 영모재(永慕齋)가 있는 마을이다. 또한 통정대부충무위사용(通政大夫忠武衛司勇)을 지낸 유은의 묘(墓)와 석조보실(石造譜室)이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필자가 불목을 찾아가는 날은 집집마다 김장하는 모습과 길옆 제실이 있는 곳에서 문중시제를 지내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유래비가 세워져있는데, (중략)만물의 영장인 인간(人間)에게는 역사(歷史)가 있다. 국가(國家)에는 국사(國史)가 있고, 지방(地方)에는 지방사(地方史), 마을에는 마을유래(由來)가 있으니, 우리 마을은 서기(瑞氣)가 응집한 곳에 위치한 마을로 유구(悠久)한 세월 한 가족처럼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며 인심 좋은 이들이 오순도순 살아왔다. (중략) 동민(洞民)들이 뜻을 모아 전설(傳說)과 사실(事實)에 의해 변천과정과 위치를 간략(簡略)하나마 기록해 둠으로 먼 훗날 후손들이 마을 역사(歷史)를 참고하고 애향심(愛鄕心)을 고치시키기 위해 이 마을 비를 세운다고 쓰여 있다.

기계유씨 영모재.
기계유씨 영모재.
기계유씨 석조보실.
기계유씨 석조보실.

#250년 이상 된 가옥과 조선시대 종계변무( 宗系辨誣)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광국지경록판목(光國志慶錄板木)이 발견된 마을
시골 마을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불목리도 인적은 거의 보이지 않고 낯선이의 방문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두 마리 백구가 연신 경계하며 짖어대고 있다.
유래비를 뒤로하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콩 타작을 했는지 넓은 밭 가장자리에 주민 두 분이 서리태(검은콩) 이삭을 줍고 계신다. 인사를 드리고 마을 소개를 부탁드리니 아주머니 한 분이 콩 줍는 손을 멈추고 이야기를 해주신다.
“제가 이 마을에 살고 있는지 30년 넘었는데요. 우리 마을은 예부터 마을 사람들끼리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상부상조하며 지내고 있답니다. 예전에는 마을 안쪽에 찬물 내기라는 바가지 샘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답니다. 당시는 마을 사람 모두가 이 우물로 식수도하고 밥도 짓고 했지요. 물이 풍부해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딸린 적이 없었답니다” “지금 볼 수 있을까요?”하고 필자가 물으니 “지금은 아쉽게도 흔적을 찾을 수 없어요” 하시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으신다.
생명의 원천인 마을 샘을 중요시하는 필자로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말에 실망감이 들었다.
주민들과 이야기를 끝내고 마을 안쪽을 들어가니 최근 신축했는지 깨끗한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듯 인기척도 들리지 않고, 대문은 굳게 잠겨있어 문 안쪽을 살펴보는데, 비석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비석 뒤쪽으로 오래된 듯 보이는 한옥 한 채가 보인다. 발길을 돌려 조금 전 밭에서 만난 주민들을 찾아가 한옥에 대해 물어보니, 기계유씨 재실이라고 한다.
몇 년 전 기계유씨 영모재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광국지경록판목(光國志慶錄板木)이 발견되었다. 영모재는 1690~1771년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판목은 조선 시대 종계변무( 宗系辨誣)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64호로 등록되어 있고,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국지경록판목(光國志慶錄板木)은 선조가 1587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을 마치고, 기념하기 위해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짓고 화답한 내용을 모아 1701년 편찬한 것을 1744년 영조 24년에 다시 새긴 판목(板木)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는 명(明)에 조선 왕조의 잘못 전해진 가계에 대해 오기된 것을 정정요구 한 내용이다.

박규수 신도.
박규수 신도.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며, 민의를 대변했던 개화파 박규수의 정신이 살아있는 충효의 마을
마을 탐방을 끝내고 필자의 발걸음은 조선시대 개화파의 거두라고 하는 박규수 신도비를 찾아갔다.
신도비는 몇 년 전 묘를 불목리로 이장하면서 함께 세웠는데, 그의 발자취를 잘 설명해 놓고 있다. 박규수는 북학파의 한 사람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1866년 평안도 관찰사 시절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시민을 약탈했던 제너럴셔먼호 선원들과 배를 침몰시킨 역사적 인물이며 학자이다. 이후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지만, 조선 말 신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개화파이기도 하다. 그의 학맥을 보면 사림파를 이끌었던 야은 길재, 점필재 김종직, 정암 조광조, 충암 김정, 율곡 이이,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김옥균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신도비에 철종 10년(哲宗十年) 학정에 못 이긴 백성들이 수령(守令)을 축출하고 관속을 살해하며, 관사(官舍)를 소각하는 민란(民亂)이 전주(晋州)를 중심으로 영남(嶺南)에서 일어났다. 조정(朝廷)에서 공론 끝에 공(公)을 적임자로 추천 영남 안핵사로 파송하니 공은 민의에 따라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민란을 수습한바 조정에서는 그의 공(功)을 높이 평가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승진 기용하였다고 쓰여 있다.

/양화용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장하는 모습.
김장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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