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서서
경계에 서서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1.1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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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최생호(문화충전소 가람뫼 대표, 보은읍 강산리)

푸른 날의 흔적들을 남김없이 불태운 나무들이 앙상하다. 추운 겨울을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을 알기에 마지막 불꽃을 태운 잎들도 미련 없이 떨어진다. 지는 모습이 가볍고 부드럽다. 바닥에 내려앉아 바람 부는 대로 뒹굴고 밟히는 대로 부서진다. 그렇게 계절은 화려한 퇴색의 향연을 뒤로하고 찬바람 부는 겨울로 가고 있다. 기후 변화로 뚜렷한 사계절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지만 아직, 단풍은 그 빛깔을 잃지 않고 있다. 자연의 마지막 자존심인 듯 황홀한 단풍이 애잔하게 다가왔다. 환절의 경계에서 인간은 무력하고 나약하다. 사람과 자연의 경계에서 사람은 결코 자연을 넘지 못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아득해 보였던 인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다. 아직도 마음은 가늠하기 어렵다. 질풍노도의 시기처럼 감정의 기복은 오르락내리락 주책없이 흔들리지만 몸은 야속하게도 세월의 흐름에 맞춰 닳아 간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분수를 알라며 몸이 먼저 말을 한다. 어릴 적 야심 차게 꿈꿨던 미래가 사라진 자리엔 소심하고 소박한 소망들이 일렁이며 하루하루를 지탱해 준다. 막연한 꿈과 현실의 경계가 얼마나 먼지 경험한 시간들이다. 그 경계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수가 존재함도 알았다. 하지만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꿈을 잃어버려도 안된다. 꿈이 없는 삶은 버텨내기가 너무 버겁다. 다시 꿈꾸는 날들이어야 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 현실이 꿈에 그리던 그 순간이었음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그 지점까지 바짝 힘을 내 보자. 꿈과 현실의 경계는 늘 함께 달린다.
경계가 있어 주인이 있고, 쓰임새가 있다. 어떤 경계는 야멸차게 침범을 거부하고 어떤 경계는 모두에게 드나듬을 허락한다. 마을과 읍내, 군과 군의 경계를 넘으면 시와 도의 경계를 마주하고 도와 도의 경계를 넘어서면 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나타난다.
경계가 있어 떠날 수 있다. 우리는 경계를 넘어 다른 경계로의 이동을 선망하며 길을 나선다. 가고픈 곳, 그 어디든 경계가 있어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경계의 불확실성은 모험으로 이끈다. 어떤 경계는 간절하게 걷어내기를 원하고 어떤 경계는 더 굳건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 땅의 경계는 삶의 동력이고, 동경이다. 경계가 있어 우리의 삶과 지역과 국가와 세계질서가 유지된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는 인간애이고 평화이며 안식이어야 한다.
함께 할 수 없는 사람과의 경계는 물리적 간극이 아닌 마음의 벽에서 비롯된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와 포용, 인간관계의 인문학적 고찰, 도덕적 의식과 내면의 성숙에 따른 철학적 소양까지 겸비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면 너무 삭막하고 고달프다.
나와 타인의 경계는 서로가 그어 놓은 선이고 시간이 쌓아 올린 벽이다. 경계가 막아 놓은 관계를 이어가게 하려면 서로의 현실적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면 경계는 사라진다. 마음을 툭 터놓고 오해와 불신을 걷어 낼 용기를 낸다면 벽은 허물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기 쉬운 모래성이다.
축제로 향한 발걸음은 신나고 가벼웠다. 지치고 힘든 젊음들이 모여들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사로잡힌 막막한 일상을 잠시나마 탈출하고자 찾았던 곳에서 꽃다운 청춘들과 다정한 이웃들이 낙엽처럼 지고 말았다. 며칠 전에는 고향 형님의 부음을 들었다. 맑고 정직하고 다정한 분이었는데 심장마비로 갑자기 먼 길을 떠나셨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덧없다. 어떤 삶은 죽을 듯이 살아내고, 어떤 삶은 살아야 함에도 애석하게 떠나간다. 어쩌면 늘 마주하는 시간 속에 삶과 죽음의 경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자리한다. 살아가는 사람,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의 경계에 애도와 영면이 교차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가깝고도 멀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순간이요 영원이다.
차가운 겨울밤, 반짝이는 별이 되어 빛나는 모든 이름들 앞에 경계를 넘어 두 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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