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똥 장군과 채독(菜毒)
(33)똥 장군과 채독(菜毒)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1.03 09:16
  • 호수 66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우리는 쟁기로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면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절구질로 곡식을 가공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각종 세시풍속을 통해 자연에 의지하고 살아오면서 많은 생활문화유산을 만들어 남겼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세월의 흐름 속에 조상들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생활문화유산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보은에 남아있는 생활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되짚어 보면서 생활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재창조의 계기를 만들어 보기 위해 우리지역 ‘보은의 생활문화유산’을 게재한다.(편집자 주)


온양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똥 장군과 채독의 모습.

지금은 볼 수 없지만, 1960년대 농촌에서는 10월의 된서리가 오기전이면 얼굴이 누렇게 뜨고, 거친 음식으로 불뚝 나온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는 환자들이 몇 명씩은 있었다. 바로 채독증(菜毒症) 환자들이다. 채독은 채소를 심는 밭에 비료가 없어 식구들이 배설해 놓은 인분(똥)을 주어 키웠기 때문에 된서리가 오기 전에 날것으로 먹으면 채소에 붙어있던 구충에 감염되어 목구멍이 가렵고, 기침이 나고, 구토, 설사를 하고, 얼굴이 누렇게 부어 고생하는 질병이다. 주로 날것으로 먹는 채소는 가장 깨끗하게 재배하여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1929년에 일본인 손에 의하여 세계3위의 흥남비료공장을 건설하였지만, 남북 분단으로 1959년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의 지원으로 충주비료공장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외국에서 수입하였던 관계로 농촌에 배급되는 비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소 외양간과 돼지우리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두엄 밭에 모아 퇴비를 만들어 논의 밑거름으로 나갔고, 조금 배급받은 비료도 벼농사의 웃거름으로 사용하여, 밭에는 전적으로 사람들이 배출하는 인분을 뒷간에 모아 배추, 무등 채소를 재배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경기도 일산에서 군 생활을 하던 1973년까지도 넓은 들판에는 채소밭 귀퉁이에 큰 구덩이를 파고 서울 사람들의 배설물을 가져와 썩히는 똥 웅덩이가 반드시 있었다. 보은지방 역시 8월말에 배추와 무의 씨를 뿌리고, 9월이면 비료대신 골 옆에 이랑을 파고, 뒷간에서 퍼 올린 인분을 똥 장군에 담아 지게에 지고 가서 새갓통으로 뿌려 키웠다. 그래서 채소에는 각종 기생충이나 박테리아가 있어 된서리가 오기 전까지는 채독증 때문에 날 것으로 먹으면 안 되었지만, 신선한 채소가 부족한 시기에 일어나는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그래도 비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당시에는, 사람들의 배설물인 인분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작물이 잘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존재로, 전통 농경사회의 대표적 거름 운반 도구였던 똥 장군도 농가마다 2-3개씩은 비치하고 사용하였다. 똥 장군은 나무나 옹기로 만들었는데, 나무로 만든 똥 장군은 옆으로 길게 만들고 가운데에 입구를 만들어 가볍고, 안정감이 있었으나 수명이 짧았고, 옹기로 만든 똥 장군은 수명은 길었으나 세로로 길게 만들어 안정감이 부족하였고, 무겁고 깨지기 쉬웠다. 보은지방에서 주로 사용하였던 옹기장군은 풍취나 학림에 있던 옹기 만드는 곳에서 만들었으며, 귀때기 동이로 5개 정도로 들어갈 크기로 만들었다. 주둥이를 넓게 만들었고, 지게에 지고 가면서 출렁거려 넘치지 않도록 짚을 뭉쳐 만든 장군 마개를 사용하였다. 근대 농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농기구였던 똥 장군도 이제는 시대의 변화로 농경문화관의 전시품으로 남아있거나, 농촌 폐가에서 없어질 날을 기다리며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