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 가을
가을, 아 가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1.0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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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철순 (시인, 마로면 관기약국)

늦은 오후의 햇살이 어디 몸 기대지 못하고 흐느적 거린다

어디서 왔는지 잠자리 한 마리

정적이 깃든 골목길을 마구 휘젓고 다닌다

졸던 세상이 화들짝 깨어나 크게 눈을 뜬다

미루나무의 키 큰 눈으로도 내려다보지 못한

가을, 아 가을

가을이 여기 저기 몸 쑤셔 박고 말없이 있었구나

빨갛게 노랗게 갈대의 미친 손짓으로

지난 시간을 들었다 놓았다 당겼다 늘였다 하면서

어디 한 곳에 마음 기대지 못하고 포효하는

나의 하루는 길다

아니 짧다

- 「가을, 아 가을」 전문 -


오래 전에 내가 쓴 시를 꺼내 본다. 가을이다. 가을 중에서도 깊은 가을, 입동 무렵이다. 올해는 일찍 서리가 내렸다. 겨울을 재촉하는 듯이. 어릴 적 먹었던 호박순 된장국을 끓여 먹기도 전에, 서리가 호박넝쿨을 한순간에 삼켜버렸다. 가을인지도 모르고 따듯하다고 얼굴을 내밀던 민들레꽃 한 송이, 서리에 된통 뺨을 얻어맞았다.

아직 들판엔 거두지 못한 벼들이 누렇게 익어있는데,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이른 서리로 농부의 손길이 바빠지겠다. 벼가 그렇고 들깨도 콩 등도 거두어 들여야 할 테니 말이다.

나의 걱정은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김장이 걱정이다. 무도 배추도 잘 자라 주었는데, 그걸 거두어 절이고 버무릴 일이 걱정이다. 나이도 먹고 몸도 예전 같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가을이면 마음도 몸도 분주하다. 한 해의 마무리를 코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새해에 다짐했던 일들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본다. 분명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이루어 놓은 것은 없다.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 녹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것만이라도 다행이다. 전에는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 곤했는데, 새벽 다섯 시면 눈이 떠진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올해는 꼭 동시집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것도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 마음에 드는 동시를 좀 쓰긴 했지만 아직 더 써야할 테다.

늦게 시작한 동시 쓰는 일이 재미있다. 시를 쓸 때 보다 더. 나이가 들어서 마음속의 어린 나를 불러내 동시를 쓰는 일, 그게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즐겁고 행복한 일을 계속할 것 같다.

화분에 심어 놓은 국화꽃이 노랗게, 보라색으로 꽃을 피웠다. 찬 서리에도 꿈쩍 안 한다. 저 국화는 봄에 같이 싹을 틔운 다른 꽃들이 봄에, 여름에 꽃을 피울 때, 얼마나 부러웠을까? 그래도 참고 또 참고 기다려 다른 꽃들이 지고 없을 때, 홀로 고고히 피어있다. 꼭 나를 닮은 것 같아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래, 조금 늦는다고 조급해야 할 일은 아니다. 누군가는 일찍 꽃을 피우고, 누군가는 늦게 꽃을 피우리라. 기다리는 일이 서럽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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