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넓은 들 만큼이나 마음 넉넉한 사람들이 사는 장안면 황곡리
(45)넓은 들 만큼이나 마음 넉넉한 사람들이 사는 장안면 황곡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0.27 09:58
  • 호수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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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용 시민기자

넓은 들만큼이나 마음이 넉넉하고 빙경산(氷鏡山) 끝자락 속리산 IC를 가지고 있는 교통이 편리한 황곡리 마을.
이번주는 장안면 황곡리(長安面 凰谷里)를 소개한다. 황곡리(凰谷里)는 속리산 IC에 접하고 있는 마을로 넓은 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곡리란 지명을 갖게 된 것은 마을 앞 넓은 들에서 해마다 풍년이 들어 가을이 되면 황금 같은 들판을 이룬다고 황곡(黃谷)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일제 강점기 황곡(거치실:荒谷)이라는 지명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황곡(凰谷)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장(場)이 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장안장(長安場)이 크다 보니 황곡리(凰谷里)까지 그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황곡리를 찾아가는 날 마을 앞 넓은 들판에는 콤바인 서너 대가 탈곡을 하는라 쉼 없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황곡리는 보은읍에서 상주 방향으로 약 10km 지점 장안면 하개리를 마주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마을 규모에 비해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고, 예부터 땅이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해 농사가 잘되는 마을로도 유명하답니다. 
2006년 문의 상주간 고속도로 속리산 IC가 마을 옆 빙경산(氷鏡山)에 위치해 있어 전국 어디에서도 편리하게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교통이 잘  발달된 마을입니다. 이날 마을 회관에서 만난 김모(72) 이모(72)주민 두 분이 필자가 마을 소개 글을 쓰려고 왔다고 하니 마을 자랑이 대단했답니다. 

심으면 풍년작이 되는 돈 논 지금도 땅 심이 좋아 농사가 잘되고, 원님이 사인남여(四人籃輿)를 타고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마을.
“우리 마을은 예로부터 물이 많아 샘이 많이 있었답니다. 가자골이라고 하는 곳에는 큰 못도 있었을 정도로 물이 풍부했지요. 상장 넘어가는 고개 길은 돈논이라는 곳이 있었을 정도로 땅 심이 좋아 농사가 잘되었답니다” 
아마도 새미재를 말씀하시는 듯하다. 이곳은 옛날 원님이 여를 타고 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고개로 남여재 또는 내미재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황곡은 땅이 비옥해 농사가 잘되고 맛이 좋기로 유명한 마을이다 보니 지금도 이곳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필자에게 마을 이야기를 해주신 어르신은 직접 농사를 지은 것으로 절임 배추를 만들어 부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하신다. “우리 마을 이장님 아시나요?”하고 옆에 있던 이모 주민께서 필자에게 물어본다. “잘 모른다”고 대답을 하니, “우리 마을 윤윤용 이장님은 농사를 지으시고 수확이 끝나면 농사짓지 않는 마을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주신답니다” “그러신가요? 놀랍네요. 농사지은 쌀을 마을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니 쉽지 않은 일인데 대단하신 분이네요”하고 필자가 감동하니 해마다 해 오신 선행이고, 자신의 선행을 내보이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하시는 72세 주민의 말을 듣고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옛날 황곡리 마을 뒤쪽에 한자골 선비들이 공부하던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양곡을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아마도 황곡리는 옛부터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왔던 환난상휼(患難相恤)이 마을 전통으로 전해지는 마을인 듯하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회관을 나와 마을을 둘러보는데,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늦가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듯 울긋불긋한 창 단풍이 들어가는 느티나무는 200년은 됨직해 보인다. 느티나무 아래 작은 표지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수한면 거현리 류원행, 강순웅 두 분의 공적비(功績碑)다. 내용을 살펴보니 마을 공동쉼터 대지를 희사하여 쉼터가 조성하게 되었고 이에 주민 일동은 공덕을 잊지 않기 위해 공덕비를 세워 기리고자 한다. 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마을회관에서 들었던 이장님의 선행과 마을 공동쉼터 조성을 위해 부지를 희사한 분들을 보니 황곡 주민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데, 들어갈 땐 보이지 않았던 마을 유래비가 마을 초입 가로수 아래 외로이 서 있다. “동녘에 우뚝한 구병산(九屛山) 서쪽, 멀리 금적산(金積山), 속리산(俗離山)과 구병산(九屛山)에서 발원(發源)한 금강(錦江)물이 마을 앞에 내를 이루는 곳에 일찍이 양짓말 아랫말, 새터 말의 촌락(村落)을 이루어 서로 돕고 사랑하며 수백년(數百年)을 살아온 터전, 달 밝은 밤에 봉비(鳳飛)로부터 봉황(鳳凰)이 날아와 쉬어 놀던 빙경산(氷鏡山) 그 아래 지어진 이름이 황곡(凰谷)이라 봉우리 골짜기마다 역사(歷史)와 전통(傳統)이 서려 조상(祖上)의 숨결이 면면(綿綿)히 이어진 살기 좋은 곳, 황곡리(凰谷里) 마을 앞들과 진사래들 뒤로는 가자골 들과 서들이 평야(平野)를 이루고 수십 년 전 개발(開發)된 가자골 복(洑) 서들, 뒷들, 새들 복(洑)(洑)의 넉넉한 물로 해마다 풍년풍사(豊年農事)를 이루니 1960년에 설치(設置)한 삼가저수지(三街貯水池)로 몽리면적(蒙利面積)이 확충(擴充)되고 1980년 수해복구(水害復舊)를 성공적(成功的)으로 추진(推進)하여 넓은 들에는 년년세세(年年歲歲) 풍작이고 골짜기마다 과수(果樹)와 특작(特作)의 경제작물(經濟作物)이 재배(栽培)되어 풍요로운 농촌(農村)을 이루어 나갈 희망(希望)의 마을이 되었다. 1970년 새마을 운동(運動)으로 취락(聚落)이 개선(改善)되고 생활환경(生活環境)이 일신(一新)되었으며 마을 앞에 25번 국도(國道)가 지나고 속리산(俗離山)으로 통(通)하는 505번 지방도(地方道)가 마을 입구에서 교차로(交叉路)를 이루어 편리한 교통(交通)을 자랑한다. 마을주민(住民) 모두가 경로효친(敬老孝親)과 인의예지 정신(仁義禮智 精神)이 투철(透徹)하며 교육열(敎育熱)이 높고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아름다운 덕(德)을 쌓아간다. 우리 주민(住民)은 물려받은 이 터전을 잘 보존(保存)하고 가꾸는 정성(精誠)을 모아서 황곡리(凰谷里)를 발전시키도록 결연(結緣)한 의지(意志)를 확인(確認)하는 바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느티나무 아래 작은 세워진 수한면 거현리 류원행, 강순웅 두 분의 공적비(功績碑)다. 마을 공동쉼터 대지를 희사해 쉼터가 조성되어 주민 일동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공덕비를 세워 기리고있다.
얼음이 녹지 않는다는 빙경산.<br>
얼음이 녹지 않는다는 빙경산.
가을이면 황금같은 들판을 이룬다는 하여 황곡리로 불린 마을 전경의 모습이다.
울굿불긋한 단풍이 들어있는 수령 200년 된 느티나무의 모습. 마을주민들의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황곡리 마을 유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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