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고운글] 밤에 관한 추억
[결고운글] 밤에 관한 추억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0.27 09:20
  • 호수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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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심웅섭 (해바라기문화공작소 대표, 회인면 눌곡리)

밤이 살아있던 때가 있었다. 거의 50여 년 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얘기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밤 풍경, 두려움과 신비함과 아늑함이 묘하게 뒤섞인 밤에 관한 기억들을 꺼내어 보자.
우선 밤이라고 하면 먹물 같은 어둠이 먼저 떠오른다. 내가 살던 곳은 충주시 변두리의 과수원이었다. 집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데다가 전기도 없었으니 어둠의 농도는 요즘과는 전혀 달랐다. 이 시절의 어둠은 마치 피부에 끈적하게 묻거나 옷에 배일 정도로 진하게 느껴졌다. 시내의 불빛들이 깜빡이긴 하지만 멀어서 위안이 되지 못했고 사과나무들은 어둠 속에서 괴물처럼 웅크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방 안에는 호롱불이 있었지만,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지도 않은 방의 맞은편 벽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좀 환하게 보려고 심지를 높였다가는 석유 기름 아끼라는 엄마의 꾸중이 떨어지거나 콧구멍이 그을음에 새까매질 게 뻔한 일이었다. 여름밤이면 더위를 피해 마당 한가운데에 온 식구가 둘러앉았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졌고 박쥐들은 찍찍거리며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모깃불에서는 매캐한 쑥 냄새가 났고 무릎을 내어준 엄마는 오랫동안 부채로 모기를 쫓아주셨다. 조금만 졸라대면 어른들은 옛날얘기를 해주셨다. 호랑이 이야기, 운 센 장수 이야기, 거기에 할아버지의 살짝 터무니없는 무용담도 있었지만 밤에 듣기로는 도깨비와 귀신 이야기가 으뜸이었다. 무덤을 파먹는 구미호 얘기와 ‘내 간을 달라’는 시체 얘기는 수백 번을 들었음에도 항상 머리털이 솟구쳤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한몫을 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원체 약골인 데다가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과수원이다 보니 밤에 어디를 놀러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4~5학년이 되어서야 세 살 많은 형을 따라 여수월 마을로 밤마실을 가곤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밤에 할 수 있는 놀이가 많지 않았다. 겨우 할 수 있는 놀이가 술래잡기 (도둑놈 놀이라고 불렀다) 정도였다. 밤에 하는 술래잡기는 낮에 하는 그것과는 좀 맛이 달랐다. 약간의 두려움과 흥분으로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느낌, 술래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도 어둠이 나를 가려주니 오히려 스릴감이 더해졌나 보다. 한번은 동네 누나랑 짚풀 속에 숨었는데 누나가 나를 꼭 끌어안아서 숨이 막히면서도 알싸한 느낌이 들었던 기억도 남아있다. 그런데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는 술래잡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그야말로 살이 떨릴 정도로 흥분되는 집단놀이가 있었다. 바로 이웃동네와의 석전(패싸움이라고 했다)이 그것이다. 아이들은 작대기를 들고 돌을 던지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는데 마치 진짜 전쟁을 치르듯, 밀고 밀리는 석전은 그야말로 스릴 그 자체였다. 물론 어둠이 없었다면 맛볼 수 없는 스릴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살아있는 밤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전깃불이 들어오면서 어둠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이제 밤은 그저 휴식과 놀이를 위한 개인적인 시간일 뿐, 전혀 무섭지도 신비하지도 않은 하루의 일부가 되었다. 밤에 누구네 집엘 찾아가는 문화도 사라졌고 대신 술집이나 클럽 등을 찾는 새로운 밤 유흥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문명이 발달하고 시대가 변했으니 당연한 데다가 편하기까지 하니 불만은 없다. 다만 가끔은 살아있는 진짜 밤, 어둠 속에서 조마조마하며 귀신 얘기를 듣거나 밤마실 다니던 시절이 그리울 뿐이다.
내일부터 3일간, 회인에서는 보은 야행이 펼쳐진다. ‘피반령도깨비와 함께하는 인산인해 회인야행’이라는 부제로 열리는 이번 야행에서는 달빛 아래 콘서트와 그림자극, 전기수가 들려주는 회인 문화재 이야기, 회인 밤마실, 도깨비를 이기는 미션투어 등등 아날로그 감성이 듬뿍 묻어나는 밤 문화들이 펼쳐질 예정이다. 특히 이번 야행은 대부분의 행사들에 주민들이 주인공으로 직접 나서서 이야기를 꾸려간단다. 우리 고장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밤 축제에서 잃어버린 밤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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