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주거문화 (뒷간)
(31)주거문화 (뒷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0.20 09:06
  • 호수 66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우리는 쟁기로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면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절구질로 곡식을 가공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각종 세시풍속을 통해 자연에 의지하고 살아오면서 많은 생활문화유산을 만들어 남겼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세월의 흐름 속에 조상들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생활문화유산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보은에 남아있는 생활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되짚어 보면서 생활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재창조의 계기를 만들어 보기 위해 우리지역 ‘보은의 생활문화유산’을 게재한다.(편집자 주)


보은읍 강신리의 뒷간.
보은읍 강신리의 뒷간.

사람들이 항상 자기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도 가장 보기 싫어하고, 더럽다고 피하는 것은 무엇일까 ? 아마도 똥이 아닐까 한다.
똥은 지구상의 모든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도 매일 매일 먹으면서 배출하는 배설물로 상형문자인 한자로는 분(糞), 즉 쌀(米)과 다른 물질(異)로 표시하며, 이를 배출하는 장소가 뒷간이다.
뒷간을 고려시대에는‘측(厠)’이라 했으며, 조선시대의 양반층에서는 ‘측간(厠間)’이라 하고, 서민들은 ‘뒷간’이라고 불렀다. 뒷간은 ‘뒤에 있는 방’이라는 뜻으로 냄새나고, 더러워서 눈에 띄지 않게 집 뒤에 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 같다.
보은지방에서도 뒷간이라고 부르다가 ‘변소(便所)’라고 많이 부르고 있는데, 변소는 중국식으로 표현한 편한 곳이라는 ‘편소(便所)’가 바뀐 이름이다. 지금도 우리가 통상 똥은 크게 편한 대변(大便), 오줌은 작게 편한 소변(小便)으로 부르고 있으며, 사찰에서 ‘근심을 더는 장소’라고 부르는 ‘해우소(解憂所)’나 서양에서 부르는 ‘Rest Room’ 역시 같은 맥락의 이름이다.
제주도와 일부 남부지방에서 부르는 ‘통시’는 농사에 필요한 거름을 만들기 위해 뒷간과 돼지우리가 한 공간에 만들어진 곳을 말하며, 통시에서 자란 돼지는 똥을 먹고 자란다고 해서 ‘똥 돼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은지방도 이제는 깊은 산골마을까지도 뒷간이 집안으로 들어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지만, 1970년대까지도 뒷간은 부엌이나 안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문 옆이나,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식구들의 배설물을 담아내어 농사의 중요한 거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당시 뒷간 풍경은 기둥에 부정한 물품이라고 방으로 가지 않고 뒷간으로 간 빛바랜 노란봉투의 부고(訃告)가 못이나 철사에 끼워져 있었고, 판자나 거적으로 만든 뒷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배설물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파고 묻어 놓은 큰 독 위에 쪼그리고 앉아 볼 일을 볼 수 있도록 판자나 작은 통나무로 만든 우물 정(井)자형의 발판이 있었고, 쪼그려 앉은 앞에는 용변을 마친 후 뒤처리하는 짚이나 신문지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옆 빈 공간에는 옹기로 구운 똥 장군 과 자루가 긴 바가지, 동이 등 퍼 올려서 밭으로 운반하는 처리기구가 놓여 있었다.
뒷간은 식구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지만, 여름이면 발판에까지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고, 냄새가 심할 뿐 아니라, ‘뒷간 귀신’이야기로 공포의 대상이 되어 어른들도 밤에 뒷간에 가면 보기 흉한 뒷간 속을 손전등으로 몇 번이고 확인하기도 하였고, 도시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들은 뒷간이 무서워 시골 할머니 댁을 오지 못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옛날부터 ‘뒷간 귀신’을 섬겨 집안에서 고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뒷간에 떡을 갖다 놓고 가족의 무사태평을 빌 때도 있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