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서로돕고 살아가는 동학의 정신이 내려오는 장안면 장내리
(43)서로돕고 살아가는 동학의 정신이 내려오는 장안면 장내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0.13 10:12
  • 호수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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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용 시민기자
장내리 전경
장내리 전경.
장내리 전경
장내리 전경.
장내리 회관.
장내리 회관.

#만세동천(萬世洞天)어진 백성들이 대추나무를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을
어느덧 가을 향기 물씬 난다. 이번주는 1893년 전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왜 세의 탄압에 맞서 동학인 들과 함께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쳤던 민중의 소리가 스며있는 장내리를 소개하는 날입니다. 장내리는 보은읍에서 동쪽으로 약 15km거리에 있는 마을로 장안면에 속해있다. 장내리는 1리, 2리가 인접해 있는 관계로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황금 들녘을 가로질러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장내1리 유래비가 필자를 반겨준다. 보습산 자락에 솔바람 불고 만세동천 굽이 흐르는 언덕 어진 백성의 마을 옥녀봉 아래 신선바위 전설도 아득하고, 이무기가 살았다는 북두 문이 깊은 소(沼)에 갈모(笠帽)바위 떠 있구나 봄이면 초가지붕 살구꽃이 붉히고 여름에 대추나무 푸른 숲 우거지던 시절, 그 옛날에는 대추의 명산지이다.
19세기 말 국운이 기울 때 홀연히 일어선 수만 명 동학군이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창의(倡義)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이곳은 동학의 2대 교주 해월신사 최시형(海月神師 崔時亨)이 대도소(大都所)를 세웠던 천도교(天道敎)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어버이를 공경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선(善)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마음의 고향 그 이름 장안이라고 쓰여있고, 1993년 성균관 전학 이흠수님, 송암 안영구 님의 글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 유래비를 살펴보고 회관을 찾아가니 주민들이 모두 들에 나가셨는지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장내 2리에 있는 산수경로당을 찾아가니 어르신 예닐곱 분이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어르신들께 마을이야기를 부탁하니 조복순 (78)어르신께서 흔쾌히 말씀해 주신다. “장내리를 옥녀봉에서 바라보면 우리나라 지도모양으로 보인답니다. 그러다보니 제주도집이라고 불렀던 집이 있었지요. 지금도 감나무가 많이 있는 집이랍니다” “그렇군요. 장내리가 우리나라 지도처럼 생겼군요. 언제 한번 옥녀봉을 올라가 봐야겠네요” “네! 한번 올라가 보세요”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탄부에서 오셨다는 95세 어르신께서 “예전에 거무샘이라고 있었지, 지금 장 체험장 앞들에 있었는데, 지금은 농지정리를 해서 찾을 수가 없지만, 예전엔 그 물로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나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했어요. 그리고 지금 보건소가 있는 자리는 장터라고 해서 우리가 어렸을 적엔 큰 장이 섰답니다. 산수경로당 최고 연장자이신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어르신 한 분이 여기 경로당은 인근 마을에서 많은분들이 이용하고 있는 시설이랍니다”라고 말씀해 주신다.
“어르신들 장안의 내력에 대해서 말씀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하고 필자가 평소에 궁금했던 장안에 대해서 여쭈어보니, 예전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길 “옛날에는 큰 장터가 있었는데, 그 마장(馬場)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장안이라 불렀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럼 이곳에 큰 시장이 있었나 보네요” “잘은 모르지만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잘 아시다 시피 우리 마을은 동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답니다” “아~네!” 당시 신앙의 자유를 위해 집회를 시작했지만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 구호가 바뀌었고 많은 사람들이 집회를 했던 1893년 장안 취회를 어르신들도 알고 있는 듯하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산수회관을 나와 마을을 둘러보는데, 장내2리 마을 유래비가 눈에 들어온다.
 

장안면 장내리 장류 체험장.
장안면 장내리 장류 체험장.
장안면 장내리 마을자랑비.
장안면 장내리 마을유래비.

#구국충정과 척양척왜(斥洋斥倭)하고, 제세안민(濟世安民)을 설계하기 위하여 대도소를 설치한 것을 동민의 지적재산을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충절의 마을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운동인 동학 농민군이 창의(倡義) 깃발을 높이 들고 부패한 서정을 바로 잡아 구국충정의 일념(一念)으로 척양척왜(斥洋斥倭)하고 제세안민(濟世安民)을 설계하기 위하여 대도소를 설치하고 3만여 군중들을 지휘하고 모의한 성역으로 우리 동민은 지적재산으로 여겨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 우리 마을은 땅이 토박하고 물이 부족하여 달밤에도 가뭄이 든다는 메마른 곳으로 밭농사에 의지하던 차에 1960년 삼가저수지가 축조되고, 1970년 경지 정리로 인하여 수리안전답이 되었으며, 1970년에 새마을 사업으로 주거환경이 개선되고, 1972년 통일벼 다수확과 벼 기계화 이양법이 전국에서 최초로 시범 부락이 되었다. 토산물로는 맛과 색이 뛰어난 장안 대추를 꼽을 수 있다. 우리 장내리 주민들은 조상들이 닦고 가르친 애친경장(愛親敬長)하고 인목상조(隣睦相助)의 유훈(遺訓)을 이어받아 살기 좋은 우리 고장을 가꾸고 관리하여 힘차게 살아가겠다고 쓰여 있다.

마을 유래비를 살펴보고 장안들을 바라보니 어느덧 황금 들판이 물결을 치고 있다. 올해도 장내리는 풍년가를 울려야 될듯하다. 마을 유래비를 읽고 황금 들판을 가로지르는데, 메뚜기 수십 마리가 후루륵 날아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조금 전 마을 유래비에 쓰여 있던, 애친경장(愛親敬長)하고, 인목상조(隣睦相助)의 유훈(遺訓)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아가는 장내리 마을은 지금도 동학의 정신이 면면히 내려 오는듯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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