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유교문화(제례)
(30)유교문화(제례)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0.12 19:05
  • 호수 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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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우리는 쟁기로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면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절구질로 곡식을 가공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각종 세시풍속을 통해 자연에 의지하고 살아오면서 많은 생활문화유산을 만들어 남겼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세월의 흐름 속에 조상들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생활문화유산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보은에 남아있는 생활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되짚어 보면서 생활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재창조의 계기를 만들어 보기 위해 우리지역 ‘보은의 생활문화유산’을 게재한다.(편집자 주)

보은향교의 주관으로 봉행한 금화서원 추계 제향의 모습이다.
보은향교의 주관으로 봉행한 금화서원 추계 제향의 모습이다.

우리는 5,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옛날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으로 지칭되며 살아왔다. 특히나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을 펼치며 유교문화를 꽃피운 조선 500년간은 엄격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격식을 유지하면서 사회를 지탱해 왔다. 지금은 사회의 큰 변혁으로 관례는 자취를 감추었고, 혼례는 예식장에서, 상례는 장례식장에서 현대화된 모습으로 변화하였지만, 제례(祭禮)만큼은 전국의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보은지방에도 충청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보은향교(95호)와 회인향교(96호)를 비롯하여 충암 김정, 대곡 성운, 동주 성제원, 중본 조헌, 우암 송시열 선생님을 모신 상현서원과 금화서원,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우시고 순절한 의병장 중봉 조헌과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700명의 의병을 모신 수한면의 후율사, 조선말기에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호산 박문호 선생님을 모신 회인면의 풍림정사, 원정 최수성, 충암 김정, 병암 구수복 선생님을 모신 마로면의 고봉정사 등 수 많은 제향공간에서 자체예산 또는 보은군의 지원을 받아 1년에 2 회 춘계와 추계(秋季)로 옛날의 격식을 유지하면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필자도 올해는 선현(先賢)님들에게 올리는 제향에 참여하고자 2022년 10월 1일 11시에 봉행하는 삼승면 선곡리 571-1 소재 금화서원을 찾았다. 금화서원(金華書院)은 1758년 유생 강재문등 105인이 발기하여 건립한 서원으로 조선 중기인 1545년(명종 1년)에 을사사화를 피하여 금적산 자락에 은거하면서 계당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최흥림과 대곡 성운, 동주 성제원, 남명 조식 등 4현과 최운 선생님을 모신 곳이다. 이날 봉행한 추계 제향은 보은향교의 주관으로 관계자분들이 일찍 나오셔서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정하고 집례절차를 논하는 등 분주하였다. 제향에 참여하는 기관단체장들과, 군의원, 유림, 서원에 모신 5현의 자손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11시가 되자 김기웅 장의의 집례로 옛날의 격식에 따라 초헌관은 구연겸 보은향교의 전교님, 아헌관은 금화서원이 자리한 삼승면의 이옥순면장님, 종헌관은 보은군의회 김응철 의원님이 맡아 집례의 진행에 따라 다섯 분의 위패(位牌) 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잔을 올리고 절을 올리었다.
제향 공간 밖의 마당에 배열한 참여자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집례의 진행에 따라 간간히 절을 올리며 1시간 이상 엄숙한 제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참여자 대부분이 층계도 간신히 오르는 70대 후반 내지는 80대의 고령자들로 이루어졌고, 집례절차도 일반인들은 알아듣기도 어려운 격식을 취하고 있어, 자신들의 조상 제례도 지내지 않는 지금, 선현들에게 제례를 올리고 그 분들의 가르침을 언제까지 이어 받을지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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