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구인리 마을 소개
(42)구인리 마을 소개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10.06 10:24
  • 호수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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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용 시민기자
구인 마을 전경
구인 마을 전경.

효제(孝悌)는 어진 것이 근본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정신이 배어 있는 예안향약(禮安鄕約)의 기본 정신인 4대 향목을 지켰던 용화, 용기 두 형제의 환난상휼(患難相恤)정신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효제 마을 구인리.

이번주는 형제의 효성과 우애가 깊은 다리가 있다고 전해지는 장안면 구인리를 소개한다.

구인리는 보은읍에서 상주방향으로 약 8km떨어진 마을로 예안이씨세거비(禮安李氏世居碑)가 있는 마을이다.

구인리 마을에 도착하자 커다란 세거비가 눈에 들어온다. “동(東)쪽 멀리 소백산(小白山)줄기 구봉산(九峯山)은 병풍(屛風)같이 둘러 있고, 마을앞산 옥녀봉(玉女峰)은 신라축조 삼년성(新羅築造三年城)을 마주보는 중앙지(中央地)가 보은(報恩)땅 구인리(求仁里)로 예안이씨세거지(禮安李氏世居地)이다.. 중략”이라고 쓰여 있다.

세거비 옆에는 작은 비석 두 개가 있는데, 전참봉이공용화진휼불망비(前參奉李公用華賑恤不忘碑), 유학이공용기진휼불망비(幼學李公用琪賑恤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용화, 용기 두 형제가 마을이 어려울 때 구휼하니 그 고마움에 마을주민들이 불망비를 세워준 듯하다. 뒤에 작은 비석은 예전에 세운 것으로 글씨가 흐려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훗날 다시 세운듯하다.

세거비를 뒤로하고 마을 회관을 찾아가니 김영자(84), 김봉순(92), 김희상(84)어르신이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어르신들 안녕하세요? 추석명절은 잘 보내셨나요?”하며 반갑게 인사를 드리니 “어디서 오셨나요?”하시면서 김영자 어르신이 필자를 맞아주신다.

물이 풍부해 농사가 잘되고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어, 인기가 높은 구인리 농산물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마을 소개 글을 쓰려고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인사를 드리니 18살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다는 김영자 어르신께서 여기 계신 사람들 모두 22살, 23살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하신다. “그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디딜방아로 보리쌀 찧는 것이 하루 일과 였어요. 보리쌀을 찧을 때 처음엔 물을 붙고 아시(애벌)찧은 다음 다시 한 번 더 찧는 답니다” “그럼 보리쌀을 두 번 찧는 거네요?” 하고 필자가 물어보니, “그럼요. 그리고 다시 퍼내기(넓은 옹기)에 넣고 손으로 깨끗한 물이 나올 때 까지 닦았답니다. 그렇게 해서 밥을 지어도 보리밥이 무척 거칠어답니다. 그걸 먹고 살았지요”라고 하신다.

“그러면 젊은 시절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리쌀 닦는 것이 하루 일과 여겠는데요?”라고 물으니 “그렇지요.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때가 되면 보리쌀 닦는 게 일이었고, 작은 환각 골로 나무하러 가고 나무 한 짐하고 다시 밭에 가서 밭 메고 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지요” 김영자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계시던 김희상 어르신이 젊은 시절 고생하신 이야기를 풀어 놓으신다. “맞아요. 그때는 아침에 눈만 뜨면 하루 종일 일하는 게 전부였답니다” 김봉순 어르신도 젊은 시절 고생하며 살아오신 생각이 나는지 지그시 눈을 감으시며 옛 이야기를 꺼내신다. “남자들은 되내기(말티고개 뒤에 있는 골짜기)까지 가서 나무 한 짐하고 오는 것이 일이었고, 다리묵게, 새칭이, 상촌에 있는 논밭으로 일하러 다니는 것이 전부 였어요. 지금은 좋은 세상이 되었지요. 되내기나 삼거리 가서 나무하러 갈 때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서 그곳에서 불을 피워 도시락을 데워 먹고 왔지요. 그때는 모두 고생이 말이 아니었답니다” 김봉순 어르신께서 한참을 이야기하시는데, 노병진(83) 어르신께서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들 하시나요?” 하면서 회관으로 들어오신다. 필자가 설명을 드리니 “우리 마을 앞에 조패미라는 곳이 있었지요. 지금의 농공단지 뒤쪽 부근이고, 마을 앞산에 진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었지요. 그리고 대목이, 은행나무 골 등이 있었고, 숙박게라는 곳이 있었어요. 그곳에는 서낭당이 있어 매년 정월 초 열사흘(음력1월14일) 날에 제사를 지내곤 했답니다. 지금은 하지 않지만 제가 젊었을 때 마을 어르신들이 꼭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신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2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와 마을을 들러 보는데 마을 유래비가 회관 옆 느티나무 아래 잘 조성되어 있다.

“구인리는 마을 입구에 서낭나무와 다리가 있어 귀신교(貴紳橋) 또는 지렁이들(蚯蚓坪)이라 불리던 곳이다. 구인리라는 지명을 얻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 불곡 이천 선생의 후손인 이성만, 이은만 형제가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예안이씨 정착촌이 되었는데, 두 형제의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다는 소문이 보은현감으로 있던 이번(李蕃)이 듣고, 영의정으로 있던 그의 아우 이여(李畬)와 함께 마을을 들러 두 형제의 효성과 우애를 극찬하고 마을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영의정 이여(領議政 李畬)가 효제(孝悌)는 바로 어진(御眞) 것이 그 근본(根本)이다. 라고 말하며 마을이름을 구인교(求仁橋)라고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구인리(求仁里)는 귀인다리, 방아다리, 대목이 쇄실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쓰여져 있다.

구인리 세거비.
구인리 세거비.
구인리 예안이씨세거비.
구인리 예안이씨세거비.
구인리 정거장.
구인리 정거장.
구인리 정류장.
구인리 정류장.
구인리 회관.
구인리 회관.
구인유래비.
구인유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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