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인생(人生 : 교육)
(28)인생(人生 : 교육)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9.29 09:31
  • 호수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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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우리는 쟁기로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면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절구질로 곡식을 가공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각종 세시풍속을 통해 자연에 의지하고 살아오면서 많은 생활문화유산을 만들어 남겼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세월의 흐름 속에 조상들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생활문화유산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보은에 남아있는 생활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되짚어 보면서 생활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재창조의 계기를 만들어 보기 위해 우리지역‘보은의 생활문화유산’을 게재한다(편집자 주)


파주 한국근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된 국민학교의 생활모습.
파주 한국근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된 국민학교의 생활모습.

옛날에는 태어나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 돌을 지나고 성장하면서 어떻게 교육을 받았을까? 조선 전기(前期)까지는 양반 댁 자제의 경우에 한정되었지만, 대부분 가정에서 글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보은에서 1486년(조선 성종 17년) 태어나 30세에 대사헌과 형조판서(지금의 법무부 장관)를 지내신 걸출한 인물인 문정공 충암(沖菴) 김정 선생님의 경우에도 3세에 할머니 황씨 부인에게서 천자문과 성리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150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양반층과 평민층의 자제들은 서당(書堂)에서 훈장으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는 등 초등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하층계급과 대부분의 여자들은 초등교육마저 받지를 못해서 문맹(文盲)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서당의 시초는 멀리 고구려의 경당이나 신라의 화랑제도, 고려시대의 경관과 서사를 처음으로 보지만,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남아있던 서당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세워졌다. 서당의 종류는 자제교육을 위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교육경비를 부담하는 사숙과, 문중에서 마을에다 서당을 짓고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동계서당(洞稧書堂), 훈장이 집에서 생계유지를 위하여 만든 자영서당(自營書堂), 덕망과 학식이 뛰어난 스승을 모시고 각 마을의 재능 있는 청년자제를 선택하여 교육시키는 고급서당인 문중연립서당(門中聯立書堂)이 있는 등 마을마다 서당이 설치될 정도로 많은 서당이 있었으나, 대부분 남자만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이었고, 여자들은 대부분은 집 안에서 개인적으로 언문(한글)을 가르쳐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여자들을 위한 서당교육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개량서당이 보급되면서 부터로, 당시에는 소학교(초등학교)가 의무교육이 아니었고, 학비 또한 서당에 비해 비쌌던 관계로 서당이 소멸되지 않아, 1921년 일제 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전국의 서당 수는 2만5482개, 학동 수 29만8067명에 이르렀으나 학동이 상위 계층에 한정되어 있어서, 1945년 해방 당시에도 문맹률이 78%에 달했었다. 서당은 8.15 광복 후에 교육법 제정으로 학제가 정비되어 점차 소멸되면서, 교육기능 역시 국민학교(초등학교)로 이전 되었다. 보은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09년에 삼산소학교(초등학교)가 처음으로 설립되고, 중초소학교, 종곡소학교 등이 설립되어 규모를 갖춘 교육이 이루어졌지만, 6.25 전쟁 후 급격히 늘어나는 학생 수와 재정부족으로 필자가 1회 졸업생으로 다닌 학림국민학교는, 1956년도에 개교를 하였지만 교실이 없어, 산성리에 있는 잠실(蠶室: 비단을 만드는 누에를 키우던 집)과 학림리에 있는 창고를 빌려 책상도 없이 흙바닥에 가마니나 멍석을 깔고 4학년 1학기까지 엎드려서 공부하면서 쥐벼룩과 빈대들의 밥이 되기도 하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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