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물 걱정 없고, 담장도 없는 이웃주민간 유대관계 돈독한 장안면 오창2리
(40)물 걱정 없고, 담장도 없는 이웃주민간 유대관계 돈독한 장안면 오창2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9.21 16:51
  • 호수 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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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우리의 산, 들, 실개천까지도 우리 조상들이 정겹게 불러주던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시작하는 마을탐방을 통해 우리마을 지명에 얽혀 있는 숨어 있는 전설과 선인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공업화, 현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젊은이들의 탈농, 그리고 직장을 찾아 이농하면서 마을의 현실은 고령의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을소멸이라는 우울한 미래를 점치기도 하지만 조상이 남긴 마을에는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습니다. 주민의 삶의 터전인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하며 마을탐방 연재를 시작합니다.<편집자 주>


오창2리 마을회관.
오창2리 마을회관.

오창2리는 밭이었던 장자불 앞들에 1957년 장재저수지가 조성되고 논으로 개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마을로 현재는 사시사철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고 있는 부자 마을이다.
이번 주는 담장 없는 마을 오창2리를 소개한다.
오창2리는 장자불이라고 불리던 마을로 보은읍에서 속리산 방향 약 8km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동쪽으로 장재리(독점)가 있고, 남쪽으로 구인리, 서남쪽으로는 길상리, 북쪽으로는 오창1리를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장자불은 옛날 앞 벌판에 표 씨가 마을을 개설하였다 하여 장자불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장자불 앞들은 원래 밭이었는데, 1957년 장재저수지가 조성되고부터 논으로 개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저수지가 만들어지고 우리 마을은 물 걱정 없이 잘사는 마을이 되었지요" 마을회관에서 만난 최홍분(87) 어르신이 장자불의 내력을 말씀해주신다. "우리 마을은 옛날부터 의리가 많았던 마을입니다. 지금도 마을에 담이 없을 정도로 마을 사람들 간에 유대관계가 돈독하지요" 최홍분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필자에게 이 말도 해야 한다는 듯 옆에 있던 정영식(72) 어르신께서 한 말씀 거들어 주신다. 
몇 년 전 마을사업으로 담 없는 마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번 주 소개하는 오창2리는 역사적 사건이나 전설을 많이 간직한 마을이다. 마을 북쪽 대궐터(장재리)는 취락구조 개선할 때 만들어진 한옥이 있는 마을로 1464년 세조가 속리산으로 피접 올 때 임시로 머물렀던 자리로 대궐 터라는 지명이 있는 마을이 있고, 동쪽으로는 독을 만들었다는 독점(장재리) 마을과 그 뒤 말티재 오르기 전 세조를 치고 단종을 복위하려던 반란 세력들이 몰살당했다는 슬픈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는 소실 티라는 골짜기가 있고, 북 바위 전설이 있는 마을이 주위에 있기 때문이다. 
마을 동쪽으로 일명 시루봉이라고 부르는 비구리(지게에 사용하는 바구니)산이 있는데, 번 구리 산 아래 수통골이 있다. 현재는 산림청 휴양림으로 사용하고 있다. 

담장없는 오창2리 마을의 모습.
담장없는 오창2리 마을의 모습.

#낯선 이에게도 경계감 없이 대해주시는 마을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는 담장 없는 마을 
"예전에는 마을에 샘이 두 개 있었는데, 물이 귀해서 힘들었지, 하지만 저수지가 생기고부터 마을에 물 걱정 없이 잘사는 마을이 되었답니다" 마을회관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지나가던 어르신께서 옛날 어렵게 사셨던 마을 이야기를 해주신다. 
올해 84세라고만 밝히신 어르신은 "저수지가 생기기 전에 마을에는 두레박 샘이 두 개 있었는데, 물이 귀해 돌아가면서 물을 길었다"고 하신다. 
"마을 앞에 작은 개울이 있었지만, 비가 온 뒤 금방 말라붙어 물이 흐르지 않았어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서로서로 협조하면서 함께 물도 기르고 나무도 함께 하면서 살았어요"
지금은 그 어르신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옛날 같은 낭만은 없지만 풍족한 물과 넓은 들판에서 나오는 곡식들이 풍부해 서로 정을 나누면 살아가고 있다고 하신다. 
특히 저녁 골에서 생산되는 쌀은 맛이 좋아 많은 분이 찾고 있다고 하신다. 저녁 골 쌀 맛은 지난주에 소개했다고 하니 어르신들이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해주신다.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밝은 모습과 낯선 이에게도 거리낌 없이 대해주시는 모습을 보니 답장 없는 마을사업을 한 주민들의 열린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세종대왕 유서판을 걸어놓은 실기비. 1946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세종대왕 유서판을 걸어놓은 실기비. 1946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예안이씨 제실
예안이씨 제실.

#1437년 천문학 기구인 대간의(大簡儀), 소간의(小簡儀), 앙부일구(仰釜日晷), 혼천의(渾天儀)를 만든 과학자이자 행정가로 장영실을 추천한 이천 장군은 수시로 내륙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대마도까지 출정하여 징벌한 문무를 겸비한 이천 장군의 유서각(諭書閣)과 추원각(追遠閣)이 있는 마을
마을회관을 나와 오창2리 본 마을 서쪽 끝에 자리한 암소 바위를 찾아가는데, 저 멀리 저녁 골에서 시원한 바람이 필자의 가슴을 확 트이게 해준다.
오창2리는 조선 국초 태조에서 세종 시대까지 4대 왕을 모셨던 과학자이자, 행정가, 무관이었던 불곡(佛谷) 이천(李천) 장군의 유서각(諭書閣), 추원각(追遠閣)이 있는 마을이다. 암소 바위는 예안인(禮安人) 숭사재(崇思齋)가 있는 마을이며, 그 옆으로 실기비(實記碑)를 건립하고, 세종대왕 유서판(諭書板)을 걸었다. 실기비(實記碑)는 송곡 (松谷)(지금의 구인다리 남쪽 옛 쇄실마을)에 있었는데, 1946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이천 장군의 추원각을 살펴보고 다시 돌아 장재리 마을을 지나오며 저 멀리 보이는 박석티(말티고개) 그리고 소실 티 골을 바라보니 종쟁이들에서 북을 울리면 저녁 골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박석티를 바라보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세조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음 주에는 조카를 버리고 나라의 안정을 택한 세조의 전설이 담겨있는 장재리(독점)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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