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학문을 사랑하고 근면하여 먹을 것이 끊이지 않았던 장안면 오창1리
(39)학문을 사랑하고 근면하여 먹을 것이 끊이지 않았던 장안면 오창1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8.25 09:37
  • 호수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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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우리의 산, 들, 실개천까지도 우리 조상들이 정겹게 불러주던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시작하는 마을탐방을 통해 우리마을 지명에 얽혀 있는 숨어 있는 전설과 선인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공업화, 현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젊은이들의 탈농, 그리고 직장을 찾아 이농하면서 마을의 현실은 고령의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을소멸이라는 우울한 미래를 점치기도 하지만 조상이 남긴 마을에는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습니다. 주민의 삶의 터전인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하며 마을탐방 연재를 시작합니다.<편집자 주>

오창마을 전경
오창마을 전경
오창리 마을길
오창리 마을길

#오봉산아래 자리하고 있는 오창1리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을로 귀농 . 귀촌 인들에게 인기가 많아 이주 문의가 끊이지 마을
2022년 8월 여름 더위도 막바지에 다다른듯하다. 벌써 가을의 향기가 짙어지고 있다. 
이번주는 속리산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오창리를 소개한다. 
오창리는 세조가 1464년 속리산으로 피접 올 때 군사들이 머물렀다는 사창리(士倉里), 오심이(悟心里), 오룡리(五龍里)를 합하여 오늘에 오창리(悟倉里)가 된 마을이다. 
오창은 보은읍 동쪽 약 8km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2006년 이전 까지만 해도 속리산으로 가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통일탑 삼거리를 지나 미륵댕이 고개를 넘어가는데, 추모공원(追慕公園) 공사가 한창인지 여기저기 산을 파헤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미륵댕이 고개는 미륵불이 있었던 고개라고 그리 불렀다고 한다. 
미륵댕이불은 삼년성안에 1902년 보은사를 창건한 주지가 일제 강점기에 이전하여 보관하고 있는 석불인데,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륵댕이 고개를 넘으니 저 멀리 새창이들이 나온다. 새창이들은 세조가 행궁에 머무를 때 군사들이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고, 새창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는 들로 그 옆은 저녁 골이라고도 불린다. 저녁 골은 세조의 저녁밥을 이곳 쌀로 지어드렸다고 해서 그리 불렀는데, 지금도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밥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새창이 들을 지나니 수림이 재가 보인다. 수림이재는 나무가 많아 그리 불렀다고 한다. 수림이재를 지나니 비로소 오창리가 나온다. 
오창리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 오봉산아래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이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깔끔한 모습을 띄고 있다. 오심이(오창1리의 옛 이름)는 귀농 . 귀촌 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마을로 지금도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들의 문의가 끊이질 않는 마을이다. 마을 앞 정자에서 만난 오상순(88) 어르신께서 마을 자랑이 대단하시다. 
오늘은 객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이 벌초하러 와서 벌초하는 동안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서 마을 뒤 뒤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예전엔 뒤골로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마을어른들은 나무를 하러 말티고개를 넘어 속리산까지 다녔답니다. 지금은 그 어르신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마을에 대한 역사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답니다. 저도 어른들에게 조금 들었을 뿐이지요. 직접 본 것은 없답니다." 마을 앞 정자에서 만난 노인은 필자가 마을 소개 글을 쓰러 왔다고 하니 오창리 주위에 있는 옛 고개이름을 알려주고 갔다.

오창리 마을 안 길
통일 삼거리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진출했지만 조선에 출중한 인물이 나올 것을 두려워해 조선의 산맥을 끊었는데, 오창리 앞 장승배기 고개의 산맥도 그 당시 끊어 놓았다고 한다.   
"우리 마을 오시기전 작은 고개가 수림이재고요. 대궐터로 넘어가는 저고개가 장승배기고개랍니다." 예전에는 장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아! 저기 적송이 많이 있는 작은 고개가 장승배기 고개인가요? 하고 필자가 대궐 터 쪽 소나무가 많은 작은 고개를 가르키니 "네! 저곳이 장승배기 고개이고요. 그 옆이 동녘고개랍니다" 하면서 마을골목길로 바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장승배기고개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진출했지만 조선에 출중한 인물이 나올 것을 두려워해 여기저기 산맥을 끊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고개이다. 이여송이 보은까지 와서 산세가 하도 좋아 말티고개 앞에 있는 장승배기고개와 목 고개, 동녘고개의 산세를 끊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동녘고개는 지맥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필자가 봐도 산세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지금도 수 백 년이나 되어 보이는 적송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심이골 넘는 고갯길
오심이골 넘는 고갯길
오창리 마을회관
오창리 마을회관

#오창리는 옛 부터 학문을 사랑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근면하므로 먹을 것이 끊이지 않았던 마을로 역사와 전통을 중시 했던 양반마을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마을 유래비를 살펴보는데, 임금님이 지어주신 오심이(悟心里) 마을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영봉 속리산 천왕봉 줄기인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靜脈)의 오봉산(五峯山)품에 자리한 마을로 1464년 세조 대왕이 속리산을 오실 때 수림이재를 넘어 우뚝 솟은 오봉의 기상을 보고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悟心(오심)이라 부른 것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마을사람들이 학문을 사랑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근면하므로 이웃마을에서 양반들의 마을이라 부르며 부러워한 역사와 전통이 서린 우리 마을은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오심이(悟心里)는 1리로 사창(士倉)과 오룡이(五龍里)는 2리로 나누었다고 쓰여 있다. 

마을 유래비를 읽고 필자의 발걸음은 장자불로 향하는데, 세조임금에게 저녁밥을 지어 드렸다는 저녁 골을 바라보니 어느덧 벼이삭이 만개하여 풍년을 약속하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목 고개를 바라보고 동녘고개를 넘어 담안들로 발길을 옮긴 필자는 행궁터(대궐터) 와 독점마을을 지나 불곡(佛谷) 이천장군(李천將軍)의 실기비(實記碑)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천 장군은 세종 때 장영실과 함께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만드신 분으로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대마도 징벌할 때 최윤덕과 함께 첨절제사로 참여 하신 분으로 다음 회 오창2리 소개 글에 올리겠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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