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북실 12마을에 속하는 보은읍 강신리·누청리·성족리
(38) 북실 12마을에 속하는 보은읍 강신리·누청리·성족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8.18 09:38
  • 호수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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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우리의 산, 들, 실개천까지도 우리 조상들이 정겹게 불러주던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시작하는 마을탐방을 통해 우리마을 지명에 얽혀 있는 숨어 있는 전설과 선인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공업화, 현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젊은이들의 탈농, 그리고 직장을 찾아 이농하면서 마을의 현실은 고령의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을소멸이라는 우울한 미래를 점치기도 하지만 조상이 남긴 마을에는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습니다. 주민의 삶의 터전인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하며 마을탐방 연재를 시작합니다.<편집자 주>

강신리 마을 입구
강신리 마을 입구.
강신리 마을 입구에 있는 보성오씨열녀문(寶城吳氏烈女門).
강신1리 회관
강신1리 회관.
연자방앗간 내부
연자방앗간 내부.
강신리 마을 느티나무
강신리 마을 느티나무.
마을회관 옆에 있는 방앗돌.

강신리는 6~70년대 최고의 소풍 장소 둥그레 봉이 있는 마을로 보은 사람들의 추억이 묻어 있는 마을. 이번 주는 강신, 누청, 성족리를 소개한다.
강신리(江新里)는 보은읍 동북쪽 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安良), 와평(瓦坪), 신촌(新村), 점촌(店村), 독산(獨山)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청리(樓淸里)는 누저리(樓底里)와 강청리(江淸里)를 병합했고, 성족리(聲足里)는 소라리, 송촌(松村)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주 소개하는 3개 마을은 북실 12마을에 속하는 지역이고, 세 개 마을이 서로 인근에 접하고 있으므로 역사적 문화적 차이가 없는 관계로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강신리 마을 앞에는 작은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이름은 독산 또는 둥그레 봉이라고 한다. 이곳은 6~70년대 최고의 소풍 장소였고, 보은읍에서 학교에 다닌 사람들이라면 둥그레 봉에서 보물찾기하던 추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바람불이 삼거리를 지나 종곡 쪽으로 향하니 옛 추억이 깃든 둥그레 봉이 필자를 반겨준다. 동산 앞 석재상이 있던 곳은 캠핑장이 들어서 있고 몇 채의 집들이 형성되어 있다. 강신리는 지형적으로 보면 봉황이 품고 있는 황금알 같은 형국이다. 마을 동남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서남쪽까지 야트막한 한남금북정맥과 지맥이 휘장을 두르듯 길게 형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둥그레 봉을 품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보성오씨열녀문(寶城吳氏烈女門)이 보이고 개교 76년을 자랑하는 종곡초등학교가 소나무 숲속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학교를 지나 마을 회관에 도착하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회관 옆 보건지소 앞에는 김응주(65) 이장이 관리하는 맷돌 두 개가 나란히 방문객을 반겨준다. 옛날에는 우리 마을에 연자방아가 있었지요. 연자방앗간은 마을에서 생산되는 곡식들을 빻기도 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하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었답니다. 현대식 기계방아가 들어오고 우리의 전통문화가 사라지듯이 연자방아도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맷돌이라도 보관하고 싶어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관리하고 있답니다. 김응주 이장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 문화를 지키고 싶어 하는 진솔한 마음이 깊게 느껴진다. 이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전통문화인 연자방아를 재현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필자의 발길은 누청리로 향하고 있었다.

누청리 마을 입구
누청리 마을 입구
누청리 충신문
누청리 마을 위쪽에 사괴정이라는 충신문.

누청리는 누각(樓閣) 아래 있다고 해서 누저(樓底)라 하다가 강청리(江淸里)를 병합해서 지금의 누청리(樓淸里)가 된 마을이다. 누청리는 예부터 효자충신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지금도 마을 위쪽에 사괴정이라는 충신문이 있다.
충신비 옆면을 살펴보니 "증사헌부지평 의사전의이공휘여순의비(贈司憲府持平 義士全義李公諱勵殉義碑) 공의 휘여(諱勵)요 자는 득지(得之)이니 전의인(全義人)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휘탁의 손(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諱鐸의 孫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諱鐸의 孫)이요. 충청수사휘회수(忠淸水使諱淮壽)의 계자(季子)로서 보은현 누촌(報恩縣 樓村)에서 명종년(明宗年)에 출생(出生) 선조(宣祖) 25년 임진년(壬辰年) 4 月에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으로 국토(國土)는 초토화(焦土化)되고 선조대왕(宣祖大王)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니 국가안위(國家安危)가 풍전등화(風前燈火)라 공(公)은 분연궐기(奮然蹶起)하여 구국제민(救國濟民)의 기치(旗幟)를 든 중봉조헌 선생(重峯朝憲 先生)의 의병(義兵)으로 참여(參與)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사괴정(四槐亭)은 "임진왜란 당시 중봉조헌을 따라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송촌 김성원(松村 金聲遠)과 누산 이여(樓山 李勵)가 경주김씨와 전의이씨 두 가문이 친의(親義)를 대대로 이어가자고 기원하며 건물 네 모서리에 느티나무를 심어 사괴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종(顯宗) 때 김성원에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종5품)를, 이여에게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정5품)을 추증(追贈)하고 1717년(숙종 43년)에 명정하였다"고 쓰여 있다. 사괴정을 뒤로하고 성족리 마을 회관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성족리 마을입구.
성족리 마을입구.
성족리 마을입구에 있는 소석김선생효행추모비.
성족리 마을입구에 있는 소석김선생효행추모비.
성족리 마을회관
성족리 마을회관
성족리 방앗간
성족리 방앗간

충암 김정 선생의 선비 정신과 효자 효열 문이 많이 있고 동학의 정신이 살아 있는 마을 성족리다.
성족리는 보은의 정신을 정립해주신 충암 김정선생유적비(沖庵 金淨先生遺蹟碑)가 있는 명문가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유래비가 있고 소석김선생효행추모비(小石金先生孝行追募碑)를 모신 효행각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효행각을 지나니 효렬사인서호순처 영해박씨 효렬각(孝烈士人徐鎬淳妻 寧海朴氏 孝烈閣)이 있다. 효열각을 지나 비로소 성족리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마을 주민 몇 분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마을 소개를 부탁하니 이름 밝히시길 꺼리신 전 이장님(69)께서 우리 마을은 귀농 귀촌하시는 분들이 많이 살고 있고 지금도 많은 분이 귀농 문의를 하신다고 하신다.
"옛날에는 마을 안에 두레박 샘이 있었는데 그 물맛이 그렇게 좋았답니다. 그때가 좋았지요. 지금도 이웃 간에 상부상조하며 잘 살고 있답니다"
돌아오는 길에 성족리 마을 뒤에 있는 동학 공원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보은의 정신은 김정 선생과 대곡 선생, 의금부도사 김성원, 사헌부지평 이여 등의 왜구에게 항거했던 보국 제민의 정신이고, 동학 농민들의 정신이 보은인의 정신이라는 생각하며 돌아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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