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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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8.18 09:14
  • 호수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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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최생호 (문화충전소 가람뫼 대표, 보은읍 강산리)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던 빗줄기가 멈췄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양 퍼붓는 폭우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은 그대로 증명됐다. 자연재해 앞에 우린 그렇게 민낯을 드러낸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처량하다. 갈수록 심해지는 기후 위기의 징후들이 무시로 우리들 눈앞에서 광기를 부린다. 가늠할 수 없는 재난을 몰고 오리라는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 온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물바다가 되었다. 부자들이 가장 많이 산다는 강남의 대로에도 흙탕물이 거세게 넘쳐흘렀다. 사람과 건물과 차들을 집어삼킬 듯 비는 더욱 거세고 물살은 성난 황소처럼 들이닥쳤다. 찰나 같은 시간들 속에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속출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한숨과 절규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억센 빗줄기 보다 더 세차게 후벼 팠다. 신림동 반지하 방에서 한 줌 햇살의 고마움을 안고 살아가던 발달장애 가족이 한순간에 들이닥친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그들의 사망원인이 '익사'였다는 냉정한 결과는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내리눌렀다. 
다시 한번 묻는다. 예측할 수 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국민이 믿고 의지할 곳은 어디이며 누구인가? 숱한 물음들이 있어 왔지만 앞으로도 그 질문 앞에 허덕이며 무기력해질 것이다. 물난리의 복판에서 우리는 그것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밤사이에 도시가 집중호우의 재난 속으로 잠겨들 것을 예보했지만 대통령은 서둘러 집으로 갔다. 두 눈으로 침수가 시작된 아파트들을 보면서도 그는 강 건너 불 보듯 퇴근한 것이다. 다음 날 반지하의 참혹했던 현장을 방문한 이 나라의 대통령은 간밤의 상황 파악이 전혀 안된 딴 세상에서 온 사람이었다. 아무런 감정이나 공감도 없이 지난밤의 퇴근 상황을 이야기하며 "물이 차오르는 데 왜 미리 대피가 안됐냐"라고 물었다. 세월호 때 참사 7시간 만에 부스스한 몰골로 나타나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하는 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했던 탄핵당한 대통령의 모습이 겹쳐졌다. 
기록적인 폭우에 전국적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기에 모두가 궁금했다. 그 시간,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참모들이 내놓은 답변이 가관이다. 사저에서 전화로 상황을 지휘했고 대통령이 있는 곳이 곧 상황실이란다. 이 또한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머무는 곳이 곧 집무실이다"라고 했던 궤변과 너무도 닮았다. 재난 앞에선 참모들과 대통령의 대응이 그때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똑같은 지 소름이 돋는다. 
참사 현장을 구경하듯 들여다보고 있는 대통령과 시장의 모습을 홍보 포스터로 만든 대통령실 홍보팀의 몰지각한 행태는 섬뜩하다. 덩달아 수해복구 현장에서 "사진 잘 나오게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라는 망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으며 서로 활짝 웃는 여당 국회의원들의 정신세계 또한 이젠 놀랍지도 않은 광경이다.
재난은 공평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가혹하고 무자비하다. 국가와 공동체를 경영하고 책임지는 자들이 낮고 소외된 곳으로 스며들어 정책을 수립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이다. 100여 년 만의 기록적 폭우가 우리에게 남겨 준 건 재난의 공포와 좌절만이 아니었다. 우리를 진짜 불안하게 하는 건 전쟁 발발의 위험이나 자연재해 발생, 경제 위기 상황이나 전염병 창궐 등 국가의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는 자들의 신속한 상황 파악에 따른 위기 대처 능력이나 국난 극복 의지를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수해를 겪으며 무정부 상태란 말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제 겨우 취임 100일 밖에 안된 현 정부의 실정을 제대로 짚어 낸 것이다. 아무리 처음 해보는 대통령이라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고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다. 총체적 난국이다. 무지, 무능, 무식, 무개념, 무모함이 초래한 당연한 귀결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알고도 뽑았다.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국가란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자신이 말한 겨우 5년짜리 대통령이다. 또다시 촛불을 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민주 국가의 국민들이 정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가야 하는 비극은 없어야 한다.
여전히 비 예보는 계속 되지만 말복을 지나온 한 여름의 무더위는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다. 우리가 있는 낮고 어두운 곳부터 한줄기 햇살과 시원한 가을바람이 먼저 찾아드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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