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봉과 천왕봉 아래 조용히 자리 잡은 마을 보은읍 길상리
왕자봉과 천왕봉 아래 조용히 자리 잡은 마을 보은읍 길상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7.28 09:44
  • 호수 6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우리의 산, 들, 실개천까지도 우리 조상들이 정겹게 불러주던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시작하는 마을탐방을 통해 우리마을 지명에 얽혀 있는 숨어 있는 전설과 선인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공업화, 현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젊은이들의 탈농, 그리고 직장을 찾아 이농하면서 마을의 현실은 고령의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을소멸이라는 우울한 미래를 점치기도 하지만 조상이 남긴 마을에는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습니다. 주민의 삶의 터전인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하며 마을탐방 연재를 시작합니다.<편집자 주>

왕자봉과 천왕봉아래 조용히 자리 잡은 길상리 마을. 지금의 길상리는 보은읍에서 동쪽으로 약 7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순흥안씨 사패지지인 관동 길상2리와 양지편 길상1리를 병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왕자봉과 천왕봉아래 조용히 자리 잡은 길상리 마을. 지금의 길상리는 보은읍에서 동쪽으로 약 7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순흥안씨 사패지지인 관동 길상2리와 양지편 길상1리를 병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무더운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누가 그랬던가 여름은 더위야 맛이고, 겨울은 추워야 맛이라고, 더위를 피할 수 없으니 즐겨봐야겠다. 
오늘은 왕자봉과 천왕봉아래 조용히 자리 잡은 길상리를 소개한다. 지금의 길상리(吉祥里)는 보은읍에서 동쪽으로 약 7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순흥안씨 사패지지(賜牌之地)인 관동(官洞) 길상2리와 양지편(陽地便) 길상1리를 병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장 골에 찬 샘터. 물이 무척 차가워 손을 담글 수가 없을 정도였으며. 겨울에 물이 얼지 않았고,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았다고한다.

길상리는 양고개를 지나 윗골, 귀 고개를 바라보고 암소바위(오창2리)를 지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길상1리와 길상2리 사이에 장장 골이 있는데, 옛날 이곳에 종9품의 관리가 살았다고 한다. "장장 골에 찬 샘이라는 작은 바가지 샘이 있었는데, 찬 샘은 물이 무척 차가워 손을 담글 수가 없을 정도였지 그런데도 겨울에는 얼지 않았어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았지" 마을회관에서 만난 김덕순(77)어르신이 찬 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옛날 어른들이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했다고 하는 500년된 은행나무.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령 500년 은행나무가 마을의 안녕(安寧)과 풍년(豊年)을 지켜주고 있는 마을
김덕순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김필녀(68)아주머니께서 한마디 거든다. "우리 마을에 앞 샘이라는 우물도 있었지요. 지금은 농지 정리하면서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앞 샘에서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나누던 장소였답니다"하신다. "아~! 그러시군요. 예전에는 마을회관이란 것이 없었으니 앞 샘에서 정담을 나누었겠군요" "그럼요" 필자의 말을 듣고 있던 안언년(68)아주머니께서 맞장구를 쳐주신다. "우리 마을에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요. 옛 날 어른들이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할 때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주로 했답니다. 젊은 아낙들은 앞 샘에서 했구요. 특히 단오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이며 한해의 풍년을 바라기도 했던 장소였답니다" 
김필녀 어머니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회관을 나와 은행나무를 살펴보는데,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보은읍 길상1리 427-2번지 둘레6.3m, 높이는 27m라고 한다.

마을 입구 작은 느티나무 아래 살며시 누워있는 둥근 돌은 연자방아에 쓰였던 맷돌. 농지정리 할때 땅에서 나왔다고 한다.

길상1리를 나와 필자의 발걸음은 2리를 향하는데, 마을 입구에서 볼 수 없었던 돌 하나가 눈에 띈다. 마을 입구 작은 느티나무 아래 살며시 누워있는 둥근 돌은 연자방아에 쓰이는 맷돌인 듯하다. 가던 발걸음을 다시 돌려 회관을 들어가니 마을 분들이 몇 분 더 나와 계신다. "어째 또 오셨어요?"하며 김필녀 아주머니가 궁금해 하신다. "아예, 마을 앞에 맷돌이 하나 보이는데, 저 돌은 어떤 돌인가요?" 필자가 물어보니 "저 돌은 농지정리 할 때 땅에서 나온 돌이여"라고 하신다. "그렇군요. 이곳에도 연자방아가 있었나 보네요" "네! 예전에 어른 신들의 말씀으로는 이 마을에도 연자방아가 있었다고 하시더라구요" 하신다.
길상1리 마을 분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2리를 가기 위해 장장 골을 지나가는데, 저 멀리 버무기 고개가 보인다. 길상2리는 관골(官洞)이라고 했던 마을로 순흥안씨 사패지지(賜牌之地)였다고 하는 마을이다. 

길상1리 마을 표지석.
길상1리 마을회관
길상2리 마을회관
길상2리 마을회관

길상2리 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운용권공흡령덕비(雲龍權公흡領德碑)가 보인다. 영덕비를 지나 넓은 마을회관 마당에 도착하니 유래비가 마을의 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다. 
"서기 470년 신라 자립마립간 13년에 烏頂山에 쌓은 사성이 사적235호인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신라는 서북쪽 함림산성(含林山城)의 백제군과 싸워 늘 패하여 사기가 저하되었다. 530년 법흥왕 17년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산성 동남쪽 산봉우리를 산중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천왕봉이라 이름 짓고 그 아래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을 지어 치성을 드리니 원혼이 진혼되고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져 백제를 압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라는 더욱 큰절을 지어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553년 진흥왕 14년 속리산에 법주사를 창건하고 제일 높은 곳에 천왕봉이라 이름 짓고 이곳 삼봉재 봉우리는 소천왕봉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창건목적을 잃은 길상사는 폐사가 되고 절터만 전해온다. 마을이름은 길상사(吉祥寺)에서 연유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을 개국할 때 순흥인 안경공(順興人 安景恭)은 3등 공신이 되어 량도공(良度公)으로 봉해지고 이 터전을 사패지지(賜牌之地)로 하사받아 1421년 이곳에 그의 부조묘(不&#31079;廟)를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예안인 이수돈(禮安人 李秀墩)은 성종 때, 이항(李沆)은 기묘사화 때, 순흥인 안수(順興人 安修)는 정묘호란 때, 경주인 최상남(慶州人 崔商男), 안동인 권채응(安東人 權採應), 인조 때, 영산인 김준운(永山人 金俊運)은 정조 때, 안동인 권치인(安東人 權致仁), 용범(用範)은 순조 때 입향하였다. 그 뒤로 삼산이씨(三山李氏), 남원양씨(南原梁氏), 인동장씨(仁同張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영해박씨(寧海朴氏), 경주김씨(慶州金氏), 순천박씨(順天朴氏), 칠원윤씨(漆原尹氏), 은진송씨(恩津宋氏), 부여서씨(扶餘徐氏) 등이 정착하여 두 개의 마을로 번창하였다. 관동(官洞)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란 뜻이다. 1917년 양지편은 1리로 관골은 2리로 구분되었다. 1919년 독립만세 때는 길상리, 구인리 사람들이 모여 이창선(李昌善)등이 앞장서 삼봉재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니 이곳 사람들의 기개와 애국정신이 자랑스럽다. 삼국통일(三國統一)을 기원하던 길상(吉祥)의 터전위에 천왕봉(天王峯)은 정기(精氣)되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이 근본이니 사람마다 어질고 우뚝하다."
마을 유래비(由來碑)를 읽고 나오며 뒤돌아보니 마을 지형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부귀(富貴)가 쌍전(雙全)하는 마을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오는데, 삼복더위가 온몸을 적시니 복달음 생각이 절로 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길상리 광장
길상리 솔밭
길상리 느티나무
길상리 느티나무
길상리 흙담집
길상리 흙담집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