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기상이 살아있는 삼년 성 아래 60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아가는 마을 대야리
신라의 기상이 살아있는 삼년 성 아래 60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아가는 마을 대야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7.14 09:42
  • 호수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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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우리의 산, 들, 실개천까지도 우리 조상들이 정겹게 불러주던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시작하는 마을탐방을 통해 우리마을 지명에 얽혀 있는 숨어 있는 전설과 선인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공업화, 현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젊은이들의 탈농, 그리고 직장을 찾아 이농하면서 마을의 현실은 고령의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을소멸이라는 우울한 미래를 점치기도 하지만 조상이 남긴 마을에는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습니다. 주민의 삶의 터전인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하며 마을탐방 연재를 시작합니다.<편집자 주>

큰 산 끝이라 해서 대미라 불리었던 대야리의 마을 전경.
큰 산 끝이라 해서 대미라 불리었던 대야리의 마을 전경.
여기저기 고분들이 보인다. 크고 작은 고분마다 한쪽이 움푹 들어간 자욱이 보인다는 것이 모두 도굴의 흔적이다.
여기저기 고분들이 보인다. 크고 작은 고분마다 한쪽이 움푹 들어간 자욱이 보인다는 것이 모두 도굴의 흔적이다.

한낮의 체감온도가 40°를 넘을 것 같은 엄청난 더위가 몇일 동안 계속 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린다. 오늘은 큰 산 끝자락이라고 해서 대미라 불렀던 대야리를 찾아가는 날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대야리를 찾아가는 길은 보은읍에서 속리산 방향으로 7~8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돌통모랭이(종곡과 통일탑 갈림길에 있는 삼거리 모퉁이를 돌통모랭이라 불렀다.)를 지나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2013년에 세운 마을 유래비가 자리하고 있다. 
큰 산 끝이라 해서 대미라 불리었던 대야리는 조선 정조 때 형성된 마을로 마을 뒤 산은 전국에서 가장 큰 고분군이 있는 마을 이다.  
신라삼국통일의 전초기지였던 삼년산성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마을 대야리(大也里)는 동쪽으로 누청리 와 서쪽의 성주리, 남쪽으로 어암리, 북쪽으로 강신리를 접하고 있으며, 본디 보은군 사각 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큰 산 밑이 되므로 대미 또는 대야(大也)라 하고 보은읍에 편입되었다. 마을이 조성되기는 조선 정조 때 고령신씨의 신득록(申得綠)공이 청주 가덕에서 이곳으로 터를 잡았다고 한다. 1974년 윗 대미에서 국도변으로 옮겨오기 시작하여 아래대미가 이루어져 두 개의 자연마을이 되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효제충신(孝弟忠信)을 도리(道理)로 삼고 상부상조(相扶相助)를 생활지표로 삼아 예의 바르고 인정이 넘치는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 주위에는 고려장터(高麗葬攄)라 전해 내려오는 옛 무덤들이 지천(至賤)으로 널려있어 마을 터전의 유구(悠久)한 역사와 삼국통일을 향한 신라인들의 강인한 열정이 배여 있어 고분군을 문화재로 지정되어 새롭게 조명되고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아! 자랑스런 우리 터전 대야리! 자자손손(子子孫孫) 영원(永遠) 무궁(無窮)하리라!  
마을 유래비를 읽고 삼년성을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걸 느끼며 마을 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회관에 들어서니 어르신 몇 분이 오손도손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인사를 드리고 마을 이야기를 듣고자 찾아왔다고 하니 권영숙 (83)어르신이 우리 마을은 자랑할 것이 없는데, 하시면서 우리 마을은 옛날부터 단합이 잘되어 이웃 간에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해결하고, 어렵게 살 때는 먹을 것을 서로 나누어 먹었던 기억 밖에 없어요. 하신다.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필자가 어르신 그건 자랑 중에 자랑이신데요. 했더니 아! 그게 무슨 자랑거리요. 남들도 다 할 텐데, 하시면서 유괘하게 웃으신다. 어르신의 자랑 아닌 자랑을 듣고 있으니 옆에 있던 아주머니 한분이 커피를 한잔주시면서 피곤할 텐데 한잔하시면서 들어요. 하신다. 커피를 받아들고 이것이 바로 이 마을에 내려오는 인심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 모금 마시는데, 은은한 목하향이 코끝을 스친다. 

대야리 마을 중간쯤 200년은 됨직한 고목.
대야리 마을 중간쯤 200년은 됨직한 고목.
대야리 흙담 모퉁이.
대야리 흙담 모퉁이.
수량은 많지 않으나 가뭄이 들어도 물이 끊어진 적이 없다는 우물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마을엔 솔목샘이라고 하는 샘이 있었다고 한다.
수량은 많지 않으나 가뭄이 들어도 물이 끊어진 적이 없다는 우물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마을엔 솔목샘이라고 하는 샘이 있었다고 한다.

어르신들과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 뒤에 있는 고분군을 찾아가는데 길옆 작은 우물하나가 보인다. 수량은 많지 않으나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끊어진 적이 없다는 우물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마을엔 솔목샘이라고 하는 샘이 있었다고 한다. 작은 우물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마을 중간 쯤 오래된 고목나무하나가 보인다. 수령은 약 200년은 됨직하다. 고목나무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예쁜 흙담하나가 보인다. 흙담 모롱이를 지나 고분군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대야리 고분군이라는 안내 간판이 보이고 여기저기 고분들이 보인다. 아쉬운 것은 크고 작은 고분마다 한쪽이 움푹 들어간 자욱이 보인다는 것이다. 모두 도굴의 흔적이다. 고분군을 들러보고 돌아 나오는데, 마을 입구에서 이종기(66)이장님께서 필자를 부르신다. 이종기 이장님하고는 막역(莫逆)한 사이다 보니 격의 없이 부르기도 한다. 여기는 어쩐 일이여? 아! 예 형님 오늘 마을 이야기를 소개하는 날이라 왔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니 회관으로 올라가서 이야기를 하잔다. 감사합니다. 하고 함께 회관을 올라가니 어르신들이 몇 분 더 와계신다. 어르신들 고분군 갔다 다시 왔습니다. 하며 회관을 들어서니, "그래 잘 찾아보았나요?" 하시면서 권영숙 어르신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네! 가르쳐주신 데로 잘 다녀왔습니다."
대야리는 60가구 120명이 살고 있는데, 현재 10여 가구가 이주하여 살고 있고, 지금도 들어오고 싶어 하는 분들의 문의가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후한 인심으로 잘 알려진 마을이다 보니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문의를 하는 것 같다고 하신다. 지금 고분군이라고 하는 곳은 암소바위, 양지 말, 감골, 평각 등 주위사람들이 삼봉 재를 넘어 보은 장을 보러 다니던 길목이었답니다. 우리 마을은 특별한 자랑거리는 없지만 마을주민들끼리 단합과 협동이 잘 이루어지는 마을이지요. 하시면서 대접할게 없는데 어떡하지 하시면서 걱정을 하신다. 이장님의 자랑을 뒤로하고 마을 회관을 나서는데, 미륵고개에서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필자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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