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백송나무가 있었던 탁동(擢洞)마을 어암2리
(33)백송나무가 있었던 탁동(擢洞)마을 어암2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7.07 09:53
  • 호수 6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시민기자
삼년산성 아래 터를 잡은 보은읍 어암2리 마을전경
삼년산성 아래 터를 잡은 보은읍 어암2리 마을전경
10여 년 전 마을 뒤에 심은 어린 백송나무. 비탈진 작은 밭에 2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0여 년 전 마을 뒤에 심은 어린 백송나무. 비탈진 작은 밭에 2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 축성을 시작한지 3년만에 완성됐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 축성을 시작한지 3년만에 완성됐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문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안내 표지판
서문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안내 표지판
옥필바위
옥필바위
성내에는 아미지란 커다란 연못이 있었으며 이 주변의 암벽에는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음각돼 있는데 김생의 필체로 전해오고 있다.
성내에는 아미지란 커다란 연못이 있었으며 이 주변의 암벽에는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음각돼 있는데 김생의 필체로 전해오고 있다.

벌써 며칠째 열대아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한 낮의 기온은 30°가 넘는다. 오늘은 백송나무가 있었던 탁동(濯洞)마을 어암2리를 찾아가는 날이다. 어암리는 1914년 성신리(城新里), 만지리(晩指里), 탁동(濯洞) 3개가 통합하여 어암리가 되었다가 1973년 보은읍으로 승격되면서 어암리(漁岩里), 만지리(晩指里), 탁동(濯洞) 3개 마을을 통합, 지금의 어암리가 되었다. 어암리는 수령 약 300년 된 백송이라는 흰색소나무가 있었는데, 천연기념물 104호로 지정 되었고, 특이한 것은 나무아래 부분보다 윗부분이 더 컸던 기억이 있는 나무였다. 백송은 1792년 정조 때 탁계 김상진 선생(濯溪 金相進先生)이 중국에서 가지고와 심은 나무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연유인지 고사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고사된 백송의 흔적이라도 찾아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는 없다. 마을에서 백송의 행방을 찾고 있는데, 신헌구(82세)어르신이 어떤 일로 찾아 왔는냐고 물어 보신다. 마을 소개 글을 쓰려고 찾아 왔다고 말씀드리고 백송에 대해서 여쭈어 보니 고사된 나무는 알 수 없고, 10여 년 전 마을 뒤에 어린 백송나무를 심었다고 하신다. 반가운 마음에 어르신이 가르쳐준 마을 뒤를 돌아가니 비탈진 작은 밭에 2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백송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백송이야기를 듣고 다시 마을회관을 찾아오니 회관 옆에 마을 자랑비가 가지런히 서있다. 삼년산성(三年山城) 볕은 자락 병풍(屛風)처럼 둘러쌓고 이백성상(二伯星霜)겪은 백송(白松) 일산처럼 바쳐주네, 우뚝 솟은 금적산(金積山)은 사시사철 굽어보고 듬직한 용천산(湧川山)은 방패처럼 진(振)을 처서 모든 재앙(災殃) 막아주네, 이 가운데, 성동(城洞)하니 이름 하여 탁동(濯洞)이라 화조월석춘절(花朝月夕春節)이면 봉접(蜂蝶)들이 분주(奔走)하고 녹음방초(綠陰芳草)하절(夏節)이면 온갖 잡새 노래하네, 오색단풍(五色丹楓)추절(秋節)이면 천자만홍(千紫萬紅) 찬란하고, 분분백발(紛紛白髮)동절(冬節)이면 온갖 설화(雪花) 장관(壯觀)일세, 이런 사시가경(四時佳景)에 거주(居住)하는 동민(洞民)들은 선인(先人)들의 유풍(遺風)을 받아 효도(孝道)로 근본(根本)삼고, 공경(恭敬)으로 가치삼아 길흉간(吉凶間)에 상조(相助)하고, 환란간(患亂間)에 상부(相扶)하는 미풍양속(美風良俗)으로 생활화하면서 농사를 주업으로, 씨 뿌리고 가꾸기와 거두어 드리길 부지런 하며, 근검절약을 바탕으로 하여 우러러보아도 하늘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도 사람에게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것을 신조(信條)로 하여, 이 마을을 청결히 후손들에게 전(傳)해줄 것을 다짐하노라 1997년3월.

마을자랑비를 살펴보고 회관을 들어서니 정화자(80)어르신 한분이 계신다. 인사를 드리고 마을소개를 부탁하니 옻샘(찬샘)에 대해서 말씀해주신다. "어암리 마을 앞 지금의 스포츠파크 야구장 옆으로 옻 샘이 있었어, 옛날에는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몸을 씻곤했지요. 그곳에서 몸을 씻으면 피부병이 잘 낳았답니다. 그리고 장승배기 옆으로 대추밭지기가 있었는데 왜 그리 불렀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대추밭이 있었나 봅니다. "하고 필자가 아는 체를 하니 "그건 잘 모르겠네요"하신다. 그러시면서 "어느 날 백송이 송진을 철철흘리더니 죽더라구요. 그 모습이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혹시 누군가 나무에 몹쓸 짓을 한건가요?"하고 필자가 궁금한 듯 물어 보니, "글쎄요. 그건 모르겠네요"하신다. "많이 속상하셨겠네요" "그럼요. 우리 마을 수호 나무였는데, 그렇게 죽었으니 마을 사람들 모두 속상해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아! 그랬군요. 오늘 여러 가지 말씀해 주신 것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화자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마을회관을 나온 필자의 발걸음은 신라인의 숨결이 들리는 삼년산성을 향하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3시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인지 주차를 하고 서문 길을 올라가는데,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서문입구에 들어서니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 위쪽에 작은 표지석이 하나 서있는데 大正十三年(1924년)4月1日이라고 써있다. 앞쪽비문은 마모가 심해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아미지(娥眉池)라고 쓴 암각화가 보이고, 유사암(有思岩), 옥필(玉筆)이라고 쓴 바위가 보인다. 보은사 가는 길은 잔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다. 보은사 옆으로 미륵전이 있는데, 이곳은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석조여래입상을 모시고 있다. 석조여래 입상은 미륵댕이 고개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이곳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미륵전을 뒤로하고 삼년성에서 가장 큰 우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물터는 현재 사용하지 않아 석축만 있고 물이 흘렀던 돌 수로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물터를 살펴보고 동문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여기저기 기와 파편이 보인다. 기와 한 조각을 살펴보면서 그 옛날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을 하는데 고라니 한 마리가 필자의 방문에 놀랐는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