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며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6.3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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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철순

전에는 자주 산을 오르곤 했습니다. 젊었을 땐 구병산이나 속리산 같은 높은 산을 오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적암에 있는 시루봉이나, 서당골 관광농원에 있는 능선을 오르기도 했지요. 그땐 은비도 젊었을 때라 토끼처럼 깡총거리며 잘도 따라 다녔습니다. 어느 날 진드기가 올라 애를 먹고서는, 등산배낭에 은비를 업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부부나 은비도 그때가 가장 마음도 몸도 건강한 때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은비도 늙고 병들어 죽고, 우리도 나이가 먹고 농사일을 시작해서 여기저기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지난 사월 초파일날은 아버지 제사라 산소에 오르기 위해 오랜만에 조금 가파른 산을 오르는데, 숨은 차고 다리도 아프고 얼마나 힘이 들던 지요. 나이는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오빠와 동생들과 함께 산을 오르며, 우리가 얼마나 더 이 산을 오를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셔서도 자식들이 먼 동구 밖에서 오는 걸 보시겠다며, 마을 뒤 높은 산에 산소자리를 손수 골라 놓으셨고 거기에 묻히셨습니다. 자식사랑이 남달랐던 아버지의 선택이셨습니다.

산을 오를 때마다 나는

실어증 환자가 된다

모든 말을 버리고 나면

오롯이 열리는 귀

내 생의 한 부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살아있다는 걸

말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알 수가 있다

솔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잎새들

몸 부딪는 소리

세찬 바람이 불 때는

큰 소리 쳐가며 살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몸을 부비며

살갑게 살아온 날이 더 많았어

산을 오르고서야

비로소 내려다보이는 걸어온 길

내 뒤의 다른 사람들도

힘겹게 오르는 것이 보인다

힘들게 오를 때는

나만 힘든 길인 줄 알았는데

- 〈산을 오르며〉 전문 -

위에 있는 시를 쓴 건 오래 전의 일입니다. 문학기행으로 월정사와 상원사를 가는 길이었지요. 그 길을 걷는데 솔바람이 불면서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문득 어떤 깨달음이, 시상이 스쳐갔습니다. 살면서 큰소리치고 싸우고 그런 안 좋은 기억만이 가슴에 남아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 나뭇잎처럼 살갑게 산 날들이 더 많았던 겁니다. 그렇지요. 폭풍우치고 비바람 몰아치던 날들보다는 고요한 날들이 더 많았다는 걸 산을 오르며 깨달았던 거지요.

남과 남이 만나 부부가 되어 평생을 산다는 게 어찌 좋은 날만 있겠어요. 서로 자란 환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말입니다. 오래전 산을 오르며 깨달았던 그 힘으로 아직 남편과 함께 늙어가고, 시인으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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