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무명과 목화 솜
(17) 무명과 목화 솜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6.30 09:37
  • 호수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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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범 시민기자

 

씨앗을 맺을 때 생기는 털을 이용해 솜과 무명을 만드는 목화. 보은에서는 10월 중순이면 다래가 벌어지면서 하얀 솜 뭉치가 터져 나와 물래로 실을 만들었다.
씨앗을 맺을 때 생기는 털을 이용해 솜과 무명을 만드는 목화. 보은에서는 10월 중순이면 다래가 벌어지면서 하얀 솜 뭉치가 터져 나와 물래로 실을 만들었다.

1950년대 말까지도 보은지방에는 목화밭이 있어 가을이면 누런 벼이삭과 함께 하얀 목화송이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풍요를 상징하고는 하였다. 5월 중순에 씨를 뿌려 8월 중순이면 무궁화를 닮은 꽃을 탐스럽게 피우고, 덜 익은 열매는 달착지근한 맛이 다래와 비슷하다 하여 목화다래라고도 불렀으며,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라 주인 몰래 목화밭에 들어가 따서 주전부리로 씹기도 하였다. 씨앗을 맺을 때 생기는 털을 이용해 솜과 무명을 만드는 목화는 열대지방이 원산지로 보은에서는 10월 중순이면 다래가 벌어지면서 하얀 솜뭉치가 터져 나오고 생을 마감하지만 원산지인 열대지방에서는 다년생으로 큰 나무가 되어 자란다. 한국에는 서기 1363년(고려 공민왕 12)에 문익점이 중국의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씨앗을 붓 뚜껑 속에 숨겨가지고 돌아와 경북 산청에 있는 처가에서 재배하게 하여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 조상들은 목화로 땀을 잘 빨아들이는 무명옷을 만들어 입었고, 겨울에는 솜을 만들어 옷이나 이불에 넣어 혹독한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고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목화는 무명 옷감이나 솜으로 쓰이는 외에도 용도가 다양하여 씨는 기름을 짜서 면실유나 마가린을 만들었고, 한국조폐공사에서 만드는 지폐도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목화의 줄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목화는 용도가 다양하고 재배하기도 쉬워 한때는 전국에서 재배하여 일본으로 수출도하였으나, 지금은 화학 섬유의 발달로 사용처가 적어지고, 값싼 원면이 외국에서 대량 수입되어 이제는 관상용이나, 어린잎을 채소로 먹기 위하여 소량으로 재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목화솜은 오래되면 뭉쳐서 무겁고 딱딱해져 다시 풀어야하므로 얼마 전까지는 보은에도 뭉친 솜을 얇게 떠서 풀어 주는 솜틀집이 있었다. 장날이면 어머니들이애물단지가 된 묵직한 솜이불을 구루마에 실고 와서 가볍고 폭신한 봄, 가을용 이불로 나누어 만드느라 솜틀집 아저씨의 얼굴은 물론, 공장 주변까지도 솜 분진으로 하얗게 변하고는 하였다. 무명은 목화솜에서‘물레’로 실을 만들어 재래식 베틀로 짠 우리의 토속 직물로 의복과 침구 재료로 가장 많이 사용할 때도 있었다. 물레로 실을 뽑아 굵기도 불규칙하고, 그로 인하여 표면에 변화가 생겨 질감이나 색감의 소박한 미적 특성이 우리 민족의 감각에 잘 어울려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무명은 자동방직기로 제직된 광목이나 옥양목 등이 범람할 때도 일부 농가에서는 어머니들이 낮에는 식구들을 위하여 온갖 가사노동과 들에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베틀에 앉아 철거덕 철거덕 밤새워 옷감을 만들어 식구들의 옷가지나 이불 호청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무형문화재로 일부 지역에서만 전승될 뿐 보은지방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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