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아가씨
동백아가씨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6.23 09:20
  • 호수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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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문화공작소 대표 / 칼럼니스트 심웅섭

헤일 수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올해 여든아홉, 장모님이 노래를 부르신다. 결혼한 지 30년이 넘도록 나는 지금까지 장모님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딸인 아내도  아주 어렸을 적에 본 것을 희미하게 기억한단다.  그렇다면 대충 50년 만에 부르신다는 말인데, 그러나 장모님의 '동백 아가씨'는 음정과 박자는 물론 가사 하나 흔들림이 없다. 요즘 부쩍 기력이 약해지시고 어지러워하시는 장모님을 위해 위문공연을 한다고 너스레를 떨며 기타를 꺼낼 때까지만 해도 장모님은 다 잊어버렸다고  완강하게 버티셨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서툰 전주를 하고 서너 마디 시작하자 못 이기는 척 부르시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꽃무늬 셔츠를 입고 비스듬히 앉아 노래하시는 장모님을 바라보는데 문득 서른아홉 젊은 여인의 모습이 슬그머니 겹쳐 보인다.  어느새 자신감이 붙은 듯, 노랫소리에 힘이 실린다. 사실 장모님은 동네 가수였단다. 관광버스에서는 혼자서 마이크를 잡고 한 시간씩 유행가를 부르셨단다. 요즘은 흔한 노래방 기계조차 없던 시절이니 그 많은 노래의 가사를 모두 외워서 했다는 말이다. 얼마나 노래가 재미있고 흥이 많아 그리 불러대셨을까? 아니, 그렇게 넘쳐나는 흥을 어떻게 눌러 참고 사셨을까? 어쩌면 공무원 박봉으로 홀시아버지와 4녀 1남의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켜켜이 쌓인, 요즘 말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그리 노래를 하셨을까?
 '동백 아가씨'는 1964년 제작된 영화 '동백 아가씨'의 주제가로  세상에 나왔단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배우인 신성일과 엄앵란이 대학생과 섬처녀로 열연을 했고 순정을 바치고 버림받은 섬처녀의 애련을 그야말로 신파조로 그린 영화가 바로 '동백 아가씨'란다. 그러나 1960년 생인 내게는 어른들의 노래였고 나와는 상관없었다. 거기에 트롯이라는 장르의 질질 늘이고 꺾어대는 창법도 귀에 거슬렸다. 대신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조동진으로부터 송창식 윤형주로 대변되는 7080 노래들과 대학가요제 출신 노래들, 그리고 나중에는 김광석 신해철까지의 소위 90년대 인기곡들까지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백 아가씨'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순간은 10여 년 전, 오디오 바꿈질을 위해 대구의 어느 공장을 찾았을 때가 아닌가 싶다. 스피커를 판다는 분은 대구시내 외곽에서 무슨 기계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님이었고 나는 오디오계에 막 발을 디딘 초년생이었다.  사장님은 커다란 기계들 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스피커와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는 바로 문제의 '동백 아가씨'를 틀어주었다. 반주 소리와 젊은 이미자의 꽉 찬 목소리가 한 올 한 올 살아나더니 쩌렁쩌렁 공간을 채우고, 뒤이어 내 심장은 물론이고 솜털 한올까지 흔들어 대는 것이 그야말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만 보다가 폭포수를 머리에 뒤집어쓴 충격이랄까? '동백 아가씨'는 그 순간 낡은 흑백사진에서 바로 살아나 내 가슴에 깊이 안기게 되었다.  
 '동백 아가씨'를 통해서는 그 당시 가난과 가부장적 권위에 눌려 살아온 여인들,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멍든 가슴을 느끼는 중이다. 오늘 장모님의 '동백 아가씨'가 내 가슴을 울리는 것은 하루에 네 시간밖에 못 주무시면서 종종걸음을 쳐야 했던 장모님의 힘들고도 아름다웠던 시절, 그리고 이제 아흔을 앞두고 그 시절을 돌아보며 느끼는 가슴 저린 그리움이 전달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부디 50년만에 피어난 장모님의 동백아가씨가 빨갛게 오래오래 피어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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